[老부부]
[부부, 마지막 '추억여행']
老부부
일흔세 살 남편은 25년 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치매에 걸렸다. 부모 자식도 기억 못 하지만 딱 한 사람 아내만은 알아본다. 불편한 대로 걷고 밥 먹고 책 본다. 일흔두 살 아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간병 일지를 쓰며 지성으로 수발한 덕분이다. 남편은 아내가 장 보러 간 사이 마루 걸레질하고 세탁기 돌린다. 아내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다. 부부는 늘 손을 꼭 붙잡고 다닌다.
▶부부가 추억 어린 계곡에 갔다. 처녀 총각 때 남편이 나오라고 했던 곳이지만 아내는 바람을 맞혔다. 남편이 "여기 온 생각이 난다"더니 노래를 불렀다. "내 사랑 양춘선은 마음씨 고운 여자/ 그리고 언제나 나만을 사랑해…." 남편이 결혼식 때 불러줬던 노래다. 의사는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도 "병이 나아진 건 아니다"고 했다. 아내는 말했다. "남편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행복하게 살아갈 용기가 있습니다." 지난주 TV조선 다큐 프로그램 '코리아 헌터'에서 본 서귀포 노(老)부부 이야기다.
▶"부부 사랑은 주름살 속에 산다"는 말이 있다. 좋든 싫든 기대고 부대끼며 서로 닮아 간다. 아흔을 바라보는 시인 김종길은 늙은 부부를 한 쌍 낡은 그릇에 비유했다. "오십 년 넘도록 하루같이 붙어 다니느라 때 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자들 명이 짧아 해로(偕老)하기가 쉽지 않았다. 2000년만 해도 예순다섯 넘는 고령자 성비(性比)는 여자 100명당 남자가 62밖에 안 됐다.
▶통계청이 그제 '고령자 통계'에서 노인 성비가 올해 70.7까지 올라갔다고 밝혔다. 부부 함께 사는 노인 비율도 2000년 52%에서 2010년 57.7%로 높아졌다. 남자 수명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통계청은 2030년이면 노인 성비가 81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늙도록 오래 사는 부부가 그만큼 많아지는 셈이다.
▶일본 어느 조사에서 아내 없는 노인 사망률이 아내 있는 경우보다 80%나 높았다. 반면 남편 있는 노인 사망률은 없는 경우보다 55% 높았다. 여자는 남편 수발하느라 제명에 못 죽고 남자는 아내 수발 없으면 오래 못 산다는 얘기다. 그러나 통계청 조사를 보면 부부 노인의 만족도가 독신 노인보다 두 배 높았다. 노후 준비, 건강관리, 문화생활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안정되고 규칙적으로 사는 덕분이다. 속담에 "효자도 악처만 못하다"고 했다. "곯아도 젓국이 좋고 늙어도 영감이 좋다"는 속담도 있다. 늙은 남편 너무 타박할 일 아니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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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마지막 '추억여행'
"우리는 늘 서로에게 말했지요. 다음 생(生)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2006년 여든세 살 프랑스 정치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는 아내가 20여년 전 불치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자 모든 활동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 아내를 보살폈다. 부부는 이듬해 함께 목숨을 끊어 쉰여덟 해 결혼을 편지 글 그대로 마감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아흔 살 노인과 치매를 앓던 아내가 여행 끝에 실종됐다. NHK가 노부부의 아들과 함께 몇 달 동안 두 사람 행적을 쫓아 다큐로 만들었다. 신용카드 기록을 추적해보니 여행길은 부부의 옛 신혼여행지에서 시작했다. 부부가 즐겨 올랐던 산을 거쳐, 자주 갔던 온천에서 끝났다. 그곳 바닷가에서 부부의 옷이 발견됐다. 남편의 외투 주머니엔 동전 몇 십엔만 남아 있었다. 부부가 은행 잔고를 다 쓴 뒤 함께 바다로 들어간 마지막 '추억여행'이었다.
▶1912년 타이태닉호가 침몰할 때 뉴욕 메이시백화점 주인 스트라우스의 아내는 여자들에게 우선 내준 구명정에 오르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40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와 떨어져 살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구명정이 부족해 타지 못한 남편과 함께 가라앉는 배에 남았다. 그리스신화에서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는 한날한시 죽게 해 달라고 제우스에게 빌어 소원을 이룬다. 동양에선 "함께 늙고, 죽어 한 무덤에 묻히자"는 사랑의 맹세를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고 했다.
▶부부의 이상(理想)은 같은 날 죽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 죽음까지 공유할 만큼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미국 워싱턴공항공단 찰스 스넬링 회장이 6년 동안 치매를 앓아 온 아내의 손과 발로 살다 함께 떠났다는 소식이 어제 신문에 실렸다. 그는 "아내를 수발하는 것은 60년 동안 받은 뒷바라지의 빚을 갚는 일"이라고 했었다.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엔 "우리는 행복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뒤까지 살지는 않기로 했다"고 썼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내력도 성격도 다른 남녀가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아주 조금씩 닮아간다.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말투, 얼굴까지 비슷해진다. 서로의 결함과 상처까지도 받아들이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이 쌓인다. 결혼은 일생을 함께 거는 일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세상, 서로를 참아내지 못하는 세상에서 현대판 필레몬과 바우키스들은 가슴 저릿한 정화(淨化)요 위안이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1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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