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꾸중 마다하지 않는 ‘진실한 꼰대’의 중요성] ....

뚝섬 2024. 3. 21. 08:14

[꾸중 마다하지 않는 ‘진실한 꼰대’의 중요성]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걸”]

 

 

 

꾸중 마다하지 않는 ‘진실한 꼰대’의 중요성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칭찬의 효과를 강조하는 책들이 많다. ‘서로 칭찬합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전 국민이 칭찬하기를 연습하기도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칭찬할 구석을 억지로라도 찾게 된다. “어머,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이런 말들을 우리는 첫 인사말의 관용어처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꾸중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학교뿐 아니라 집에서도 꾸중을 듣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자녀를 꾸중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어머니는 머리를 조아렸고 더 혼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직장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꾸중과의 사투가 직장 생활의 핵심이었다. 꾸중은 어른의 사명이자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었고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뿌리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에 꾸중 대신 칭찬이 난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핵심에는 미국 문화권에 기초를 둔 긍정심리학이 있다. 꾸중을 힘들어하던 우리는 긍정심리학을 무조건 칭찬하기 혹은 무조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해석하고 적용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꾸중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칭찬과 꾸중에 대한 태도는 동서양이 크게 다르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칭찬을 밥 먹듯이 한다. ‘Excellent’, ‘Fantastic’, ‘Great’ 등 칭찬에 대한 단어들이 수없이 많고 상대적으로 꾸중에 관한 단어는 별로 없다. 이런 태도에는 칭찬과 꾸중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철학이 숨어 있다. 칭찬은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는 반면 꾸중은 동기를 잃게 한다고 믿는다. 이와 달리 한국인은 꾸중이 사람을 고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다. 비록 성과가 좋은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낼 때까지 꾸중이 이어진 이유다. 칭찬은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칭찬으로 지금 수준에 만족하며 나태해질까 걱정했다.

 

미국인과 한국인 중 누구의 태도가 옳을까?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을 얻기 위해 필자는 심리학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참여자에게 10문제로 구성된 수학 시험을 치르게 한 후 시험을 잘 본 사람을 두 그룹을 나눠 한 그룹에는 “시험을 아주 잘 봤다”고 칭찬했고 다른 그룹에는 “시험을 잘 못 봤다”고 꾸중했다. 시험을 잘못 본 사람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에는 “시험을 아주 잘 봤다”고 칭찬했고 다른 그룹에는 “시험을 잘 못 봤다”고 꾸중했다. 그 후 모든 실험 참여자에게 다른 시험 하나를 더 치르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시험을 잘못 본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면 꾸중할 때보다 두 번째 시험에서 성적이 더 낮았다. 시험을 잘못 본 사람들을 꾸중하면 성적이 더 높아졌다. 시험을 잘 본 사람들을 꾸중하면 칭찬할 때보다 두 번째 시험에서 성적이 더 낮았다.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을 칭찬했을 때는 이후 성적이 더 높아졌다.

이 실험은 성과를 올리려면 잘했을 때는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못했을 때는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교훈을 준다. 그래야 현실을 직시하고 적절한 준비와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자명한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드백은 정확하고 현실적일 때 효과가 더 좋다. 동기를 높인다는 명분으로 잘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그치거나 못한 사람에게 잘했다고 하는 건 더 낮은 성과를 초래할 뿐이다. 아쉽지만 언제부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바른말을 하는 데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진실한 꾸중일 수 있다. 꼰대’라는 이름으로 꾸중이 사라지는 지금이 안타깝다. 정당하지 않은 꾸중을 하자는 게 아니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꾸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실한 꾸중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꾸중이 멘털을 더 강하게 하고 시련과 아픔을 헤쳐 나가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기를 내는 ‘진실한 꼰대’가 더 많아져야 한다.

※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88호(3월 1호) “‘진실한 꾸중’은 어디 갔는가” 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영훈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정리=배미정 기자, 동아일보(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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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걸”

 

더 글로리’의 ‘봄에 죽자’던 말은 ‘봄을 기다려 끝내 피어나라’는 말
좋은 어른 되기는 힘들지만 친구나 울타리 되기는 좀 더 쉬워

 

보는 내내 쓰라렸던 드라마 ‘더 글로리’의 마지막 화에서 뭉클한 장면을 만났다.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린 ‘동은’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저쪽에 할머니 한 분도 물로 뛰어든다. 휘청이다 허우적대는 할머니. 동은은 제가 강물에 들어온 이유도 잊은 채 할머니를 겨우겨우 물가로 끌어낸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마지막 회에서 각자 강물에 뛰어든 주인공 '동은'과 할머니. 서로에 이끌러 물가로 나온 할머니의 "물이 너무 차다.우리 봄에 죽자,봄에"라는 말에 동은이 서럽게 울자 할머니가 애써 보듬어 위로한다. /더 글로리

 

“어우 얘,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누구 때문에 다시 물 밖으로 나왔는데. 어이없어 화를 내는 동은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얘 근데, 물이 너무 차다. 어~ 춥다. 우리, 봄에 죽자. 봄에.”

 

할머니는 웃고 어린 동은은 운다. 배우들은 추웠을 테지만, 그 순간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따뜻했다. 어른이 돼 복수를 완성한 동은은 회상한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뭐가 됐든 누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걸.”

 

라떼’를 말하는 꼰대 되기는 쉽지만 어른 되기는 어렵다. ‘좋은 어른’ 되기란 더 힘든 일인 걸 나이 들수록 깨닫는다. ‘존경할 만한 좋은 어른이 없다’는 탄식은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의 몫이라는 것도. 슬픔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설명이나 충고를 구하지 않는다. 마음을 기댈 때 미소 지어줄 친구를,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붙든 그것보다 아주 조금 더 버텨 줄 울타리를 구할 뿐이다.

 

소설가 한강에게는 소설가 고(故) 최인호 선생이 그런 친구이자 울타리였던 것 같다. 지난겨울 휴가, 무선 이어폰으로 소설가 한강 선집 전자책을 들으며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숨을 몰아쉬며 금모래 해변 위 전망대를 오르는데, 작가가 2013년 최인호 선생 별세 때 쓴 추모글이 흘러나왔다. 선생은 말년에 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다른 작가 몇과 함께 떠난 짧은 여행에서 선생은 성대가 상해 칼칼해진 목소리로 한강에게 말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출판사 막내에게 차 심부름까지 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등단 이전에 한 출판사의 막내 편집자 한강은 아무 일 없던 어느 날, 아무 일 없이 귀한 녹차잔을 깨뜨린 뒤 어두운 구석방에 오래 웅크려 있었다. 최인호 선생은 그런 한강을 돌아봐 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힘드니?’ 물어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강이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땐 일부러 불러다 앉혔다. “참 어두운 이야기다. 그런데 후반부에선 이 어두운 가족이 바다로 소풍을 가는구나. 그게 나는 참 좋더라.” 그런 선생은 한강이 영영 알지 못할까 봐, 떠나기 전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반복했던 것이다.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강은 추모 글 마지막에 “그 말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최근 새 영화 인터뷰로 만난 배우 천우희는 배우 한석규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건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천우희에게 한석규는 이런 말도 했다. “너는 물 같은 사람이야. 남들이 너는 물 같아서 자꾸 돌을 던져. 그래도 잠깐 파문이 일 뿐이야. 그냥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 천우희는 “아무리 남들이 분탕질을 해도 물 자체가 맑으면 다시 맑아질 수 있다는 말, 그게 내게 너무 좋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스승님!’ 했다니까요, 하하.”

 

‘더 글로리’의 할머니가 동은에게 ‘봄에 죽자’ 한 말은 ‘봄을 기다려 피어나라’는 말이었다.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친구이자 울타리 같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너는 물 같은 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어느새 봄이 다시 지척이다.

 

-이태훈 기자, 조선일보(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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