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윤심 타령’도 ‘어대한 타령’도 다 걷어치우라] .... [한국 보수의 길.. ]

뚝섬 2024. 6. 24. 09:17

[‘윤심 타령’도 ‘어대한 타령’도 다 걷어치우라 ]

[위기의 대한민국 정통 세력, 되살아날 방도는?] 

[보수와 진보는 도덕적 기준의 가중치가 다르다]

[‘원조 보수’ 에드먼드 버크에게 한국 보수의 길을 묻다]

[엄마, 아빠와 정치 이야기 하기]

 

 

 

‘윤심 타령’도 ‘어대한 타령’도 다 걷어치우라

 

[정용관 칼럼]

민심의 몽둥이 벌써 까맣게 잊은 듯
그들만의 한 줌 당권 쟁투 돌입한 與
망가진 ‘보수의 가치’ 되살리지 못하면
차라리 당 간판 내리라는 비판 직면할 것

 

소여(小與) 신세의 국민의힘 당대표가 한 달 뒤 선출된다. 흔히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양쪽의 균형은 심하게 깨졌다. 왜소해진 오른쪽 날개는 거대한 왼쪽 날개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형국이다. 이번 전대는 국민의힘이 제 궤도를 찾을지, 좌우 균형의 토대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이벤트다.

그런데 지난 총선 때 민심의 호된 회초리, 아니 몽둥이를 맞은 국민의힘은 참패의 기억을 벌써 잊은 듯 그들만의 당권 쟁투에 돌입한 모습이다. 당대표 선거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가나다순) 등 4파전 구도로 좁혀졌다. 이재명 대표를 다시 추대하는 식의 ‘체육관 선거’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민주당에 비해선 생동감이 돌게 됐다.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 기류도 있지만 1차에서 끝날지, 결선 투표까지 갈지, 1, 2위 표차가 어느 정도일지, 3위가 캐스팅보트를 쥘지, 그 표는 어디로 갈지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 비율이 20% 반영되는 ‘8 대 2’ 경선룰이 어떤 마법을 부릴지 속단하긴 쉽지 않다. 친윤이냐 비윤이냐 반윤이냐, 당권에서 대권으로 직행할 것이냐, 그 경우 당권-대권 분리 규정에 따라 1년 2개월 뒤 사퇴하는 것이냐 등 여러 구도와 변수가 얽히면서 경선 자체는 일단 흥행 요소를 갖추긴 했지만 뭔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 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4명의 후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보수 재집권의 성공” “당정 원팀” “대통령 견인” “이기는 여당” 등 외침의 공허함이다.

일반 국민이 보기엔 보수의 궤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왜 당대표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출사표인지 의문이란 얘기다. 이는 각 후보들의 학벌이나 판검사 출신 등 직업, 경제력 등이 갖는 계급성 때문만은 아니다. 망가진 보수의 가치, 보수의 앞날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투쟁을 예고하기보다는 당내 역학 구도에 따른 줄 세우기 양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4명의 후보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한 전 위원장일 것이다. 어대한 얘기가 나올 만큼 현재로선 당원이든 일반 국민이든 지지율이 앞서고 있지만 정치에 입문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정치 초보다. 그의 당대표 도전은 그만큼 본인으로선 미지의 정글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일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였으나 총선을 거치면서 반윤의 처지로 바뀐 한 전 위원장은 이번에 나서지 않으면 고사(枯死)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 총선 실패의 아픈 기억을 대권 승리로 상쇄하고 싶다는 야심도 있을 것이다. 그의 도전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글쎄” 하며 긴가민가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은 우선 원내 경험이 없는 원외 대표로서 어떻게 국회의원들을 지휘할지, 한솥밥을 먹었던 윤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더 본질적으론 그의 준비다. 국가 지도자는 거칠게 말하면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비전, 둘째는 이를 실행할 경륜, 셋째는 국민 지지다. 비전과 경륜은 이성의 문제이고 국민 지지는 감성의 문제다. 그는 팬덤은 있지만 아직 어떤 보수의 비전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 적이 없다. 법무장관을 지냈지만 독자적으로 차곡차곡 쌓은 경륜이라고 하긴 어렵다. 변방이나 비주류 생활을 해본 경험도 일천하다. 정치 리더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는 건 자유지만 그에 걸맞은 내면적 성찰이 동반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대 도전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딱 한 번의 승부가 될 것이다. 이재명에 맞설 ‘꿩 잡는 매’ 여론에 기댈지, 그 이상의 잠재력을 보일지는 오로지 그의 몫이다.

윤 대통령은 이재명 조국 이준석에 한동훈까지 당대표를 하게 되면 사면초가에 놓이는 형국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국민의힘 경선에 개입하고 싶은 욕구도 클 것이다. 그러나 용산 입김은 없어야 하고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젊은 보수를 지향하든, 천막 당사의 정신을 가져오든 보수 혁신, 보수의 질적 전환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투쟁, 비전 경쟁이 펼쳐지도록 경선에서 일절 손을 떼야 한다.

한 달의 경선, 윤심 타령도 어대한 타령도 다 걷어치우라. 또다시 친윤이니 비윤이니 반윤이니 하는 프레임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국민의힘은 차라리 문 닫는 게 나을 것이라는 냉소와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이번 전대가 허물어진 보수의 가치를 되살리는 ‘희망의 이벤트’가 될까, ‘절망의 이벤트’가 될까. 보수 혁신의 담론 없이는 국민의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정용관 논설실장, 동아일보(2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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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한민국 정통 세력, 되살아날 방도는? 

 

[朝鮮칼럼]

여당이 패배한 근본적 이유는 汚名이 된 ‘보수’라는 이름 때문
‘젊은 보수’ ‘따뜻한 보수’ 외쳐봐야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아프지만 보수 이름 도려내고 ‘자유’의 연고를 바르자
“우린 보수파 아니라 자유파다” 이름 바로잡아야 나라가 산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한 시인의 절창처럼 인간은 언어로써 세계를 인식한다. 사물에 알맞은 명칭이 부여되면 ‘하나의 몸짓’은 ‘꽃’이 될 수 있다. 이름이 잘못되면 격렬한 ‘몸짓’도 뿌연 재가 되어 흩날리고 만다. 매사 명(名)과 실(實)이 들어맞아야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선다. 산을 물이라 하고 바다를 뭍이라 한다면, 인간세(人間世)의 규약이 무너지고 개개인은 속임수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춘추의 혼란 속에서 공자(孔子)는 정치의 최우선으로 정명(正名)을 외쳤다.

 

최근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대통령의 오만을 거론하고, 어떤 이는 여당 대표의 미숙을 지적하지만, 진부한 남 탓은 아닐까? 더 근본적인 원인이 케케묵은 이름에 숨어 있을 듯하다. 여당을 패배로 몰고 간 음험한 이름은 ‘보수(保守·Conservative)’라는 낙인이다.

 

물론 자유주의 전통이 깊은 북미나 유럽에서 보수는 오명이 아니다. 프랑스 자코뱅의 광란을 거울삼아서 영국의 버크(Edmund Burke·1729~1797)는 개량과 실용의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그 이후 보수주의자들은 좌·우파 양극단을 피해 점진적 개혁과 실용적 발전을 도모했다. 디즈레일리, 비스마르크, 처칠, 레이건 등의 유능한 정치인, 벌린, 아렌트,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의 탁월한 이론가, T S 엘리엇, 헤밍웨이, 톨킨 같은 저명한 문인들까지 19~20세기 서양에선 급진주의와 극단주의에 맞서 사회 발전의 균형을 잡았던 다양한 보수주의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보수주의는 오늘날 한국의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한다. 전통의 지혜는 망실됐고, 자유의 역사는 짧디짧고, 법치의 경험은 얇디얇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보수는 낡고, 썩고, 칙칙하고, 냄새나고, 고리타분한 뉘앙스를 풍긴다. 반면 진보는 젊고, 발랄하고,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 식의 단순·무식한 개념 규정은 폐기돼야 마땅하지만, 언중의 일상어를 바꾸려는 시도는 밀물에 맞서려는 노력만큼 무모하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이미 멸칭이 돼버렸다. 보수의 멍에를 진 세력이 진보의 날개를 단 세력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젊은 보수’ ‘따뜻한 보수’ 등의 구호를 외쳐봐야 비탈길을 오르는 싸움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단 평지로 나아가는 정공법이 필요하다.

 

한국 현실에서 보수 세력이 다시 일어서려면 보수의 이름을 도려내는 길밖에 없다. 상처가 나겠지만, 그 환부엔 ‘자유’의 연고를 바르면 된다. 이미지 쇄신용 신장개업의 목적만은 아니다. 보수주의란 그 자체로 정연한 정치 이념이라기보단 급진과 과격, 극단과 맹목을 경계하며 전통의 지혜와 경험적 지식을 활용하려는 신중하고 사려 깊고 실용적인 삶의 태도를 이른다. 지난 200여 년 서양 문명을 일으킨 보수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자유주의였다.

 

한국 헌정사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6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자유의 깊은 뜻을 깨달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공산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민주공화국을 지킨 자유주의 혁명가였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의 유습을 끊고 전근대의 모순을 깨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으로 시작됐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자유의 기치 아래서 근대화·산업화·선진화의 혁명을 이룩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개발 독재의 시기를 거쳤지만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지면서 권위주의는 지양되었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놓고 자유의 신장에 매진했던 개혁적 진보 세력이었다. 유럽이나 북미라면 개혁적 진보 세력이 보수를 자임할 수 있겠지만, 보수=수구=꼴통’의 등식이 지배하는 한국적 토양에서 보수의 이름은 주홍글씨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이제 보수의 족쇄를 벗고 자유의 영예를 되찾아야 한다. 한국 현대사를 긍정하고, 극단·급진주의를 반대하고, 법치 파괴의 권모술수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보수파가 아니라 자유파다!”라고 외칠 때다. 그래야만 주체사상에 혼을 팔고, 중국에 “셰셰”하고, 떼 지어 “미국 소, 미친 소”를 부르짖고, 무조건 FTA를 반대하고, 반일 몰이를 일삼는 낡고 어둡고 부패한 비자유(illiberal) 선동 세력이 진보라 불리는 언어 착란을 시정할 수 있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이름을 바로잡아야 나라가 산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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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는 도덕적 기준의 가중치가 다르다

 

[朝鮮칼럼]

보수는 충성심·고귀함·권위 강조… 진보는 배려·피해, 자유에 민감
‘약자 보호’라면 내부 총질도 OK
인간이 어떻게 도덕 판단하며 무엇을 더 중요시하느냐는 민감성 없다면 상대편 설득 불가능
누가 더 옳냐 따지는 세력은 必敗
 

 

4·10 총선 지지층 결집을 위해 여야가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뉴스1·뉴시스

 

잠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 사람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까?

 

“어떤 사람이 벽장을 정리하다가 자신이 옛날에 쓰던 태극기를 발견했다. 태극기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그것을 여러 장으로 잘라 화장실을 청소하는 걸레로 썼다.”

 

매우 불쾌한가? 그런 분께 재차 물을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는 않는데 왜 잘못된 행동일까요?” “....”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기는 하지만 태극기를 걸레로 쓰다니 그건 말이 안 되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보수주의자일 개연성이 꽤 높다.

 

도덕 기반에 대해 연구해온 사회심리학자 하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 판단을 할 때 자신의 ‘직관’을 먼저 작동시키고 이유를 대야 할 때에야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즉, 직관적으로 불쾌, 경멸, 분노, 역겨움 등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그런 감정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추론’이 작동한다. 도덕 판단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직관이 우선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위의 태극기 걸레 이야기에서 별다른 도덕적 불쾌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 직관의 소유자는 대체 어떤 유의 사람일까? 보수·진보 사이의 도덕 직관의 차이에 관한 이런 의문이야말로 총선 결과와 작금의 정치적 분열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될 수 있다.

 

하이트가 전 세계 13만 명 이상의 설문 조사를 통해 제시한 도덕 기반 이론에 따르면, 모든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의 여섯 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해, 공정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 그리고 자유다. 그는 도덕성이 이 여섯 가지 기반(직관) 위에서 구성된다고 보았고, 도덕 기반 설문을 통해 각 기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예컨대 ”설사 그들의 가족이 잘못된 일을 했을지라도 가족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충성심 기반에, “군인이라면 상관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무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는 권위 기반에,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역겨운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고귀함 기반에 속한다. 위의 여섯 가지 기반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보수·진보에 따라 여섯 가지 기반의 가중치가 확연히 다르다. 보수는 여섯 가지 기반 모두를 중시하는 편인 반면, 진보는 그중 세 가지 기준에 주로 민감하다. 진보는 배려·피해 기반과 자유·압제 기반에 가장 많이 의존하며 공평성·부당성 기반도 작동시킨다. 예컨대 좌파는 우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력과 고통의 신호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약자가 강자에게서 억압받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야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우파도 자유를 강조하지만 그들은 진보 정부 정책에 치를 떨 때가 많은데, 왜냐하면 그런 정책이 특정 약자 집단(노동자, 소비자, 환경)을 보호한답시고 또 다른 집단(가령, 중소기업 사업주)을 압제하기 때문이다. 공평성·부당성 기반의 경우에도 우파는 상대적으로 “가장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가장 많은 보수가 돌아가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은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이다. 사실 이것은 개인적 차원보다는 집단적 성격을 가진다. 진보는 집단적 차원에서 작동한 이 세 가지 기반들에 대해 대단히 둔감하다. 가령, 위의 태극기 걸레 사례가 보수주의자의 심기만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것이 충성심 기반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우파는 공동체를 깨면서까지 이념을 수호하고 싶지 않은 반면, 좌파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부 총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바로 질문하지 말아야 할 문제. “우파·좌파 중 누가 더 올바른 도덕 기반을 가졌는가?” 이 물음만을 계속 던지는 진영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도덕 판단을 하며, 사람들이 어떠한 도덕 기반들을 왜 더 중시하는지에 대한 민감성 없이 그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가 없이는 왜 시골 주민과 노동 계층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거 같은 진보 쪽에 서지 않고 보수에게 표를 주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진영을 표방하든 공동체 기반의 도덕 자본을 중시하지 않는 정치 세력은 승리할 수 없다.

 

총선은 끝났지만 정치 갈등은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승리했든 실패했든 이제는 정치 공학적 분석을 넘어 국민의 도덕적 직관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해봐야 할 시점이다.

 

-장대익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 · 진화학, 조선일보(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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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보수’ 에드먼드 버크에게 한국 보수의 길을 묻다

 

[장부승의 海外事情]
심판당한 한국 보수 우파
위기 극복, 생존 비결은?

 

보수는 패배했다. 한국의 보수 진영은 국민들의 지지를 새로이 받기는커녕 오히려 심판당했다. 보수의 앞길에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드리워져 있다. 이제 보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답답한 마음에 서재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불현듯 에드먼드 버크를 떠올렸다. 프랑스 혁명 발발 직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1790)을 집필하여 혁명의 급진성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근대 보수주의의 시조. 그에게 조언을 구해 보면 어떨까. 서재 한편에 감춰진 비밀의 문을 열고 발길은 어느새 지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서 있는 18세기 영국 철학자이자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의 동상. /위키피디아

 

: 선생님, 대학생 때 처음 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버크: 오랜만에 만나니 나도 반갑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그리 얼굴이 어두워?

 

: 한국의 보수 우파가 걱정입니다. 이제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8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40~50대가 되어 사회 주류가 됐습니다. 이들은 과거를 손쉽게 부정하려 하고, 합리적이기만 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경향이 강해 보입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국판 ‘자코뱅’(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주의자)들이 정치권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견제해오던 60대 이상은 그 수가 줄고 있고, 20~30대는 정치적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버크: 자네가 만약 나의 시대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보수주의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생각하는 보수의 본질은 두 가지라네. 하나는 전통과 역사 중시, 또 하나는 추상적 이론화에 대한 배격이지.

 

보수주의자의 기질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장사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네.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지. 책상머리에서 끄집어낸 숫자 몇 개로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보수에게는 당장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는 설계도 따윈 없을지 몰라. 하지만 추상적 이론화보다 현실 속의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에게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유럽에서도 보수주의는 원래 대지주 귀족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했지. 하지만 유럽의 보수는 진화했네. 모처럼 자네가 여기까지 날 찾아왔으니 나의 후예인 영국 보수당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 왔는지 설명해 주지.

 

영국 보수당은 일본 자민당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우파 정당에 속한다네. 지난 100년(1924~2024) 중 64년간 영국의 집권 여당은 보수당이었어. 하지만 영국 보수당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보수당이라는 당명으로 치른 1846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정권을 내주지. 그 후 28년 동안 4년 반을 제외하고 보수당은 야당이었네. 그러다 1874년 보수당은 부활해. 그 후 1905년까지 31년 중 23년간 집권당은 보수당이었네.

 

부활의 열쇠는 바로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도입한 정당 개혁이었어. 1870년 디즈레일리는 전문 당료들로 구성한 중앙당 조직(Conservative Central Office)을 만들고, 지방당 조직을 전국 연합(National Union)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네. 조직 정비를 통해 당의 통일성을 높인 거지. 정책 면에서는 산업화에 따른 빈부 격차 완화를 추구하고 강한 외교를 표방했네. 디즈레일리의 개혁을 통해 영국 보수당은 귀족과 대지주의 정당에서 중산층과 일부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정당으로 확대된 거지.

 

에드먼드 버크의 초상화

 

: 그 후론 위기가 없었나요?

 

버크: 없긴 왜 없어. 당장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에 정권을 내주고 무려 16년간 야당 노릇을 했지. 1920년대에 가서야 스탠리 볼드윈이 반전 계기를 만들지. ‘신보수주의’라는 구호를 들고나오면서 기존 보수당의 자유방임 경제 노선을 버리고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인 거야. 그러면서 당의 지지 기반을 더욱 확대하지.

 

비슷한 위기가 1945년에도 왔어.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고 나서 윈스턴 처칠과 그의 동료들은 절치부심했네. 우선 당 조직을 정비했지. ‘젊은 보수(Young Conservatives)’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젊은 층을 흡수했네. 당의 교육기관으로 보수정치센터(Conservative Political Center)를 신설하고 당내 연구 기관도 부활시켰지. 동시에 당원 증대 운동도 벌여나갔네. 당 조직 강화를 통해 기초 체력을 다진 거야. 정책 면에서도 전후 복지국가의 흐름을 수용하고 노동당의 의제를 대거 흡수했네. 복지국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많은 보수가 복지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고 대중에게 호소한 거야. 그 결과,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현재까지 79년 중 49년을 보수당이 집권한 것이네.

 

: 아, 그랬군요. 우선 당 조직 정비를 통해 저변을 늘리고, 합리성만을 내세워 정적(政敵)을 ‘악마화’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대 흐름을 내다보고 상대방의 어젠다도 흡수하는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실제 정책 성과를 통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군요.

 

에드먼드 버크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고맙습니다’ 하며 연방 고개를 숙이다가 눈을 번쩍 떴을 때, 서재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한국의 보수 우파에게도 언젠가는 밝은 햇살이 비치는 날이 올까?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조선일보(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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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와 정치 이야기 하기

 

사상검증구역 

 

지난겨울, 독일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왔다. 난 정치 뉴스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A 정치인이 어쩌고, B 정치인이 어쩌고. 숱한 갈등과 소음들을 간략히 전달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말했다. “그건 정치가 아니야. 가십이지.” 정곡을 찔렸다. 그렇다. 나는 정치가 아니라 가십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뉴스만 듣고 있었다.

 

요즘 친구들이 하도 추천을 해서 보게 된 프로그램이 있다. OTT 채널에서 볼 수 있는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 견해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리더를 뽑으며 ‘정치 서바이벌’을 해나간다. 첫 화부터, 흥미롭다. 출연진은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서로의 첫인상을 가늠하고 있는데, 각자가 입소하며 했던 인터뷰가 익명으로 소개된다. 그중에는 “동성애는 후천적 오류다” “상속세를 더 떼야 한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다” 등이 있다. 하하 호호 웃던 사람들은 ‘나와 이렇게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다.

 

인터넷 댓글들만 봐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라며 놀라곤 한다. 화가 난다. 그렇다고 같이 악플을 달지는 않는다. 내가 사는 실제 세계에는 없을 인간이라는 이상한 믿음 덕분일까. 악의 세계에 존재할 요괴를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지나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이상한 댓글을 달고 있는 사람이나, 극단적인 유튜버의 영상을 보는 사람을 곁눈질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면 ‘진짜 있구나!’ 하며 찬찬히 그 사람을 관찰한다. 해어진 야구 모자를 쓰고 커다란 배낭을 멘 할아버지일 때도 있었고, 양복을 입은 아저씨일 때도 있었다. 친근해 보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요괴도 아니었다.

 

나에게 이 프로그램을 가장 절실하게 추천한 에리카(친구 이름)는 추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랑 사상이 똑같다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사상이 다른 사람이라고 무조건 싫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든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맥락과 이유와 인생을 이야기한다면,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의 입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조건 지지할 이유도 없다.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는 가족끼리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십만 식탁에 오르내린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친구이고 얼마나 다른 가족일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서는 서로가 하트를 주고받는 시스템이 나온다. 정치는 마음을 얻는 일이고, 마음을 얻으려면 대화하고 배려해야 한다. 엄마, 아빠가 정치 이야기를 하면 일단 가드부터 올리는 나다. 정치에 있어서 서로의 마음을 얻기는 진즉 포기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랑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같이 보기 챌린지를 해보고 싶다. 일단 누군가가 먼저 해보고 후기를 들려준다면.

 

-오지윤 작가, 조선일보(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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