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개발도 정치화 된 나라, 무슨 일을 하겠나]
[“뜻밖의 정무적 영향 개입”… 대왕고래 감사로 철저히 밝혀야]
[“삼전 시총 5배” 8달 만에 “대왕고래 경제성 없다”… 사기극 수준]
[이렇게 쪼그라들다 한국 증시 유명무실해질 것]
[정치가 거덜 낸 경제… 이제 기댈 곳은 기업뿐]
[다시 온 환율 1500원 공포… 정치 혼란만 탓할 수 없다]
[2024년 증시 ‘밸류업’ 외치다 ‘밸류다운’… 올해는 나아질까]
자원 개발도 정치화 된 나라, 무슨 일을 하겠나
웨스트카펠라호가 포항 앞바다에서 약 40km 떨어진 대왕고래 구조에서 탐사시추 작업을 벌이고 있다./한국석유공사 제공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불리는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의 1차 시추에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정부는 “가스 징후는 발견했으나 경제성을 확보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에 확보한 시료를 정밀 분석한 다음, 외국 기업과 손을 잡고 나머지 6개 유망 지점에 대한 추가 시추를 추진할 계획이다.
과거 개발에 성공한 동해 가스전도 11번째 시추에서 성공했고, 노르웨이 북해 유전은 33번째 시추에서 유정을 발견했다. 이번 1차 시추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를 놓고 성공, 실패를 말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그런데 벌써 ‘사기극’이라는 비난까지 나오고 있다. 1차 시추만을 놓고 ‘사기극’이라고 한다면 세계의 거의 모든 유전이 사기극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 시추를 정치 문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가 물리탐사 자료를 토대로 석유 발견 가능성을 기대해온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석유공사와 산업자원부 차원에서 차분하게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작년 6월 윤 대통령이 갑자기 나서서 대국민 깜짝 발표를 했다. 발표도 “최대 140억 배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는 등 내용을 부풀렸다. 산업자원부 장관은 “최대 매장량이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라고 한 술 더 떴다. 실제 유전이 있어도 시추 성공률이 희박한 것이 유전 개발 사업인데 ‘가능성이 높다’ ‘시가 총액’ 운운은 정치적 수사에 가까웠다. 그러자 민주당은 총선 패배와 지지율 하락에 따른 국면 전환용 카드라고 비판했다. 실제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것은 이렇게 모든 것이 정치 싸움으로 귀결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 저 당이 반대하고, 저 일을 하면 이 당이 반대한다. 이명박 정부가 해외 자원 개발을 추진했는데, 박근혜·문재인 정부가 난데없이 적폐 대상으로 단죄하면서 어렵게 뚫은 자원 개발 프로젝트가 대부분 무산된 바 있다. 이후 희토류 가격이 폭등하면서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겼다.
자원 개발은 희박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많은 실패를 거쳐야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분야다. 지금의 동해 시추 사업도 시추 성공률이 최대 20% 정도라서, 최소 5개의 시추공을 뚫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전문가들은 1차 시추에서 확보한 시료와 지질 데이터가 향후 시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정보로 활용될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무의미한 실패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적 사업은 정치에서 해방시키고 과학과 경제 논리로만 추진했으면 한다.
-조선일보(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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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정무적 영향 개입”… 대왕고래 감사로 철저히 밝혀야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가스전 개발사업)가 첫 시추 만에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책임론에 대한 공방이 거세다. 특히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가 시추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정무적 영향’을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실체와 경위에 대한 진상 규명이 불가피해졌다. 지난해 4·10총선 패배 이후 반전의 카드가 절실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불확실성이 큰 사업을 장밋빛으로 포장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산업부와 한국석유공사 등은 지난해 2월만 해도 대왕고래 프로젝트 가치를 11조 원 정도로 추정하며 신중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4개월 뒤 윤 대통령이 직접 발표할 때는 ‘최대 140억 배럴’,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약 2200조 원)로 늘었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가 6일 “생각지 못했던 정무적 영향이 개입”, “정무적 요인 때문에 많은 부담” 등을 언급한 배경이다. 주무 부처 의견을 묵살하고 대통령실이 프로젝트 추진을 강행한 것은 아닌지 규명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이 “유수의 연구기관과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다”고도 했는데 이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유망성을 주장했던 미국의 심해 기술평가업체 액트지오의 실체도 석연치 않다. 본사 주소지가 일반 가정집이고 세금 체납으로 법인 자격이 정지된 이력까지 드러났는데도 대왕고래에 이어 ‘마귀상어’로 불리는 또 다른 동해 가스전 사업의 평가 용역을 따냈다. 부실 업체에 사실상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자원 개발사업은 최소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고 성공 가능성도 극히 낮다. 그러나 과학적·경제적 판단 대신 정무적 판단을 앞세우는 건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감사를 통해 대왕고래 프로젝트 추진 과정을 낱낱이 규명하고 잘못이 확인되면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동아일보(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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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 시총 5배” 8달 만에 “대왕고래 경제성 없다”… 사기극 수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이 있다는 브리핑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불리는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사업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가 6일 “경제성을 확보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첫 국정브리핑을 열고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최대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직접 발표한 지 8개월 만에 정부가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1차 탐사시추 작업이 최근 끝난 가운데 정부는 추가 탐사시추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사실상 실패로 끝난 셈이다.
영일만 석유·가스 탐사시추 계획은 지난해 4월 총선 참패 후 국정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 1호로 ‘깜짝 발표’ 했을 때부터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탐사 성공 가능성이 20%로 상대적으로 높다고 해도, 실패 확률이 훨씬 큰 사업을 두고 대통령은 “천연가스는 최대 29년, 석유는 최대 4년 넘게 쓸 수 있는 양”이라며 섣부른 기대를 부풀렸다. 동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을 확인해준 미국 컨설팅업체 액트지오는 1인 회사나 다름없는 소규모 업체였고, 15년간 동해 지역 심해를 탐사한 호주 최대 석유개발회사 우드사이드가 재작년 1월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결국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에게 “첫 케이스(탐사시추)에서 성공할 확률은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은데 여러 정무적인 이유로 많은 부담을 안고 진행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프로젝트 성공 가능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설익은 ‘장밋빛 예단’을 앞세워 일단 발표부터 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을 사실상 실토한 셈이다. 대통령 국정브리핑에 배석한 안덕근 산업부 장관이 “동해 석유·가스 매장 가치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 정도”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쯤 되면 대통령과 장관이 국민을 상대로 짜고 친 ‘뻥튀기 사기극’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윤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와 닷새 뒤 대국민 담화에서 야당의 예산 삭감을 비판하며 대왕고래 프로젝트를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다. 과학적 근거도 빈약하고 사업성도 모호한 개발 프로젝트를 위헌·위법한 계엄을 정당화하는 근거 중 하나로 내세운 셈이다. 한국가스공사 등 대왕고래 테마주로 분류되는 기업들은 프로젝트가 사실상 실패로 끝나자 6일 시간 외 거래에서 하한가로 추락했다. 기업 가치를 흔들고 국민에게는 헛된 ‘산유국 희망고문’만 남긴 윤 대통령과 정부는 엉터리 발표와 ‘협작’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아일보(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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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쪼그라들다 한국 증시 유명무실해질 것
지난해 국내 개인 투자자가 국내 주식을 거래한 규모는 6352억주로, 1년 전보다 약 13% 줄었다. 반면 해외 거래는 40% 가까이 늘었다. 국내 증시가 주요국들 가운데 가장 부진하자 국내 투자자들이 미국 증시로 몰려가는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 탓이다. 지난해 미국 S&P500지수는 26%, 나스닥지수는 33% 상승했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도 20% 올랐고, 중국상해종합지수와 홍콩항셍지수도 각각 14%, 17% 상승했다. 반면 코스피만 9%, 코스닥지수는 23% 하락했다. 그 결과 미국 주식에 투자한 사람의 72%가 수익을 본 반면 국내 주식에서 이익을 낸 투자자는 48%였다. 상황이 이러니 증시에서 “국장(한국 시장)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이 같은 추세가 끝날 것 같지도 않다. ‘동학 개미’ 등 국내 증시가 강세를 보이던 2021년에 비하면 국내 주식 거래는 무려 48%나 줄었다. 거의 반 토막이다. 반면 해외 주식 거래는 263% 급증했다. AI 혁명으로 엔비디아 등의 주가가 급등하고 증시가 활황을 보여온 미국 시장으로 한국 투자자들이 쏠리는 현상은 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부가 지난해 초부터 증시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정책을 폈지만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투자자들의 신뢰만 잃고 해외 시장으로의 자금 이탈은 가속화됐다. 한국 증시가 부진에서 벗어나려면 대대적인 기업 구조 조정과 지배 구조 개선, 상장기업 심사 강화, 주주 이익 보호를 위한 법령 개정 등 자본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한데 전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행된 대책은 모두 겉핥기였다.
미국 증시에서 건강하지 못한 기업의 퇴출은 일상적이다. 그렇게 상장 기업의 질이 유지된다. 그런데 국내 증시에서는 기업 퇴출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상장 기업의 질적 개선도 없었다. 국내 상장기업 20%가 3년 연속으로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한계 기업들이다. 두산그룹 구조 개편, 고려아연의 기습 유상증자 등 소액 주주 이익을 훼손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자본시장 활성화가 곧 경제 활성화라는 각오로 특단의 증시 선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다 정말 한국 증시는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조선일보(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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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거덜 낸 경제… 이제 기댈 곳은 기업뿐
대규모 조직과 회사도 단 ‘한 명’ 때문에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다. 233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영국 베어링스 은행이 그랬다. 손실을 은폐하며 무모하게 거래하던 직원 ‘한 명’ 때문에 1995년 파산했다. ‘팻핑거’ 같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거짓을 거짓으로 덮다가 일을 키웠다. 하물며 그 ‘한 명’이 한 나라의 리더라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거듭된 오판과 욕심으로 휘청이고 있다.
비상계엄의 무모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경제사령탑이 대통령, 국무총리 직무에 더해 재난 총괄까지 맡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초인이 아닌 이상 경제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처럼 대행의 대행의 순서가 어디까지 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분간은 정치에 뭔가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새해 첫날이지만 기대와 희망보다 불안과 좌절이 짓누른다.
정치 실종에 자력구제 나선 기업들
새해 사업 계획을 준비하는 기업들은 ‘시계 제로’ 상태다. 보호주의가 득세하고 첨단산업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홀로 광야에 내던져진 꼴이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경제 외교와 산업 정책이 중요한 시점에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대변할 정부가 없다. 우리는 인질로 잡혀 있다”고 외신에 호소한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은 처절하게 들린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천장을 뚫고 올라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보고 있다. 지난해 주식시장은 남들이 20, 30%씩 오를 때 홀로 10% 가까이 뒷걸음질쳤다. 소비심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악이고, 기업경기는 부정적 전망이 역대 최장인 34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8년 전 탄핵 때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란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대 주력산업 모두 하나같이 위태롭다. 정치 불안으로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프랑스가 남의 일이 아니다.
정부와 정치에 기댈 수 없는 기업들은 ‘경제 외교관’을 자임하며 한국 경제를 지키려 자력구제에 나서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세계 각국에서 서한을 보내 “한국 경제는 건재하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맨 처음 만난 것도 한국 정부 인사가 아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트럼프 당선인 앞에서 “한국은 저력 있는 나라이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다시 한 번 ‘기업가 정신’ 불 지필 때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안정에 방점을 두면서도 미래 성장을 위한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로봇 전문기업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하며 로봇 경쟁에 참전을 선언했다. 현대차그룹은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하는 등 트럼프 2기 대응을 위한 진용을 새로 꾸렸다. 4대 그룹은 지난해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도 영업이익을 웃도는 규모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에 선제적으로 투자했다. 비주력사업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고, 미래성장동력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조선, 에너지, 원전, 방산 등의 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미증유의 국난을 이겨 온 데는 수출을 앞세워 세계 시장을 열어 온 기업들의 역할이 컸다. 절망과 폐허에서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단체장들이 올해 신년사에서 하나같이 기업가 정신을 재점화하겠다고 각오를 다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깜깜해 보이지만 기업이 앞장서 끌고 국민이 함께 밀면 지금의 위기도 보란 듯이 극복할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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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온 환율 1500원 공포… 정치 혼란만 탓할 수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외환시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외국인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에 이르렀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와의 협상에 나섰고, 결국 10월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 스와프를 성사시켰다. 기획재정부, 한은은 물론이고 민간에서까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물밑에서 힘을 보탠 결과였다. 이 같은 각종 조치에 힘입어 환율은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있던 환율 1500원의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2008년은 금융위기 상황으로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던 때였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자초한 위기라는 게 더 당혹스럽다. 비상계엄에 이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까지 탄핵되는 정치 리스크에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12월 30일 1472.5원에 주간거래를 마치는 등 15년여 만에 1500원에 육박하고 있다. 1년 새 무려 184.5원이나 껑충 뛴 것이다. 전문가들은 심리적 방어선으로 여겨지던 1400원, 1450원이 연달아 무너진 만큼 현재와 같은 정국 불안이 장기화되면 원-달러 환율이 곧 1500원에도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다.
당국은 시장 안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구두 개입은 이미 수차례 이뤄졌고 국민연금과 한은의 외환스와프 한도도 늘렸다. 하지만 주저앉는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인 가운데 고환율은 당장 우리 삶과 경제를 조여오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환율이 오른 만큼 늘어난 수입 결제대금을 감당해야 한다. 대기업도 외화부채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고환율은 고물가를 부추기며 가정의 생활고도 심화시킬 것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까지 1인 4역을 맡고 있는 초유의 상황이지만 원-달러 환율 1500원이 ‘뉴노멀’이 되는 일만은 막아내야 한다. 외환당국이 “대응 여력은 충분하다”고 거듭 밝히며 애써 느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치열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주요국과의 통화 스와프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카드를 꺼내놓고 대책을 설계할 때다.
급한 불을 끈 뒤에는 근본적인 구조개혁에도 나서야 한다. 환율은 결국 한 나라 경제의 바로미터다. 정치적 혼란이 원망스럽지만, 시장에서는 미루고 미뤄 온 구조개혁이 결국 고환율을 불러왔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 저하, 인구구조 등 우리 경제의 부정적 요인들이 1500원에 육박한 환율로 귀결됐다는 얘기다. 정치 리스크가 불거지기 전에도 환율은 불안한 흐름을 보여왔다.
최근 한은은 구조개혁으로 저출산, 혁신 부족 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2040년대부터는 0%대로 내려앉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경고를 내놓기도 했다. 부디 새해에는 늦기 전에 구조개혁의 포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1500원의 공포에서도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더 나아가 한은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장윤정 경제부 차장, 동아일보(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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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증시 ‘밸류업’ 외치다 ‘밸류다운’… 올해는 나아질까
‘2891.35’. 작년 7월 11일 코스피가 3,000 선 코앞까지 갔을 때만 해도 한국 증시는 순항할 것처럼 보였다. 이틀 후 미국 필라델피아 유세 중 간발의 차이로 총격을 피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주먹을 쥐고 “파이트!”를 외친 후 코스피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 그의 고관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공약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줄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달 코스피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16년 만에 6개월 연속 하락해 2399.49로 마감했다.
▷작년 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의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을 밝혔고, 소액주주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은 이렇게 시동이 걸렸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자동차 수출의 호조와 대기업들의 잇단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상반기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7월의 트럼프 총격 사건, 일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로 나타난 8월 5일 ‘블랙 먼데이’ 쇼크에 한국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주가가 조속히 복원된 것과 달리 한국의 주가 하락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작년 한 해 증시 성적표는 코스피 ―9.6%, 코스닥 ―21.7%. 큰 폭 상승한 미국 나스닥(31.4%), 일본 닛케이(19.2%), 중국 상하이지수(15.3%)와 정반대의 극심한 ‘밸류 다운’으로 끝났다.
▷하반기 서학개미들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주자 미국 엔비디아, 트럼프 당선에 기여해 ‘퍼스트 버디(친구)’가 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를 향한 ‘투자 이민’을 서둘렀다.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란 말이 상식이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엔비디아, 테슬라 주가가 됐다. 작년 말 한국인의 해외 주식투자 중 미국 비중은 관련 통계 집계 후 처음 95%를 넘었다. 국내 투자자가 보유한 미국 주식 가치는 174조 원에 이른다.
▷12·3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 수장이 제 나라 증시를 향해 던진 폭탄이 됐다. 더 떨어질 게 남았나 싶었는데, 12월 한 달간 코스피는 2.3% 더 내렸다. 연초 대통령이 툭 던졌던 ‘상법 개정’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기업들의 반발만 불렀다. 주가는 그 나라 정치·경제·사회적 실력의 총화란 명제가 작년처럼 뚜렷이 입증된 예도 드물다. 작년 증시를 망친 문제 중 뭐 하나 시원하게 풀린 것 없이 새해를 맞았다는 게 큰 고민거리다.
-박중현 논설위원, 동아일보(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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