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이란 이름은 약 600년 전 조선 태종 때부터 불리어 오는 지명이다. 고구려(금물노군), 통일신라(흑양군), 고려시대(진주)를 거쳐,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진천현이 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경기도에 속하기도 하였지만 중종 때 다시 충청도에 속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은 1990년 이후 도심화가 진행이 되어 이제는 마을 어디에도 시골 마을의 분위기는 없다. 편안히 주차를 할 만한 공간을 찾기도 어렵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제1호 근린공원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니 청주에서 광혜원을 거쳐 용인방향으로 내달리는 17번 국도 뒤로 멀리 안성의 칠장산-칠현산-덕성산에서 흘러오는 한남금북정맥의 산줄기가 아련하다.
[제1호 근린공원에서 내려다 본 수암마을]
그 산줄기 앞으로 백곡호가 자리하고 있고, 그 너머에는 태령산-만뢰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천안 방향으로 흘러간다. 넓디 넓은 벽암리-장관리 일대의 들녁이 시야에 들어온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풍요로운 들녁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벽암리 마을이다. 진천이 ‘살아서 머물 만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생거진천’이라 불린 이유가 바로 이곳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천군청과 진천읍사무소가 소재한 읍내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벽암리 수암마을은 작년까지만 하여도 마을 이름의 유래를 담고 있는 수암(秀岩, 빼어난 모습의 큰 바위)이 마을 입구에 있었다. 마을에서 제사도 지내던 상징이었는데 개발로 인하여 작년에 깨 부수워져 버렸다.
진천이 낳은 위대한 문학가 포석 조명희
없어진 그 수암 바로 건너편이 진천군이 낳은 위대한 문학가 포석 조명희(1894~1938)와 시인 조벽암(1908~1985)이 출생한 생가터이다. 시인 조벽암(본명: 중흡)은 조명희 선생의 조카이며, 두 작가는 한국 근대문학에서 확실하게 자신들의 족적을 남긴 분들이다. 1994년 포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동양일보사와 충북문인협회가 생가터 표지석을 세웠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살고 있는 조명희 선생의 장남 ‘조선인’과 장녀 ‘조선아’씨를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조명희선생은 아들과 딸 이름을 부를 때면 늘 성과 함께 큰 소리로 부르며 조국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 표시석을 뒤로하고 큰 길로 조금 나가면 포석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입구 어귀의 자투리 땅을 이용하여 건립한 공원이어서인지 다소 옹색한 크기이다.
[수암마을 입구에 있는 포석문학공원]
포석 조명희 선생은 우리민족이 힘들고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더는 버틸 수 없어 러시아로 망명할 밖에 없었고, 소련의 스탈린 독재치하에서 억울한 사형선고를 받고 1938년 약관 44세에 총살당했다. 이후에 조국에서도 이념의 희생물이 되어 작가로써 예우조차 받지 못했던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게 저려온다. 포석문학공원에 있는 그의 시 “경이”를 읇어 내려가다 보면 편안하게 보이는 진천읍내의 모습이 돌연 희뿌옇게 변하는 것 같다.
경이(驚異)
어머니 좀 들어 주서요
저 황혼의 이야기를
숲 사이에 어둠이 엿보다 듣고
개천 물소리는 더 한층 가늘어졌나이다.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어머니 좀 들어 주서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서요
저 담(달) 아래 밤나무에
아람(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 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
등불을 켜 가지고 오서요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자료들을 둘러 보는 과정에서 조명희 선생은 한국 근대문학사에 큰 영역을 차지 하고 있는 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을 주변 이곳저곳 둘러보아도 이 시의 주제가 되었던 밤나무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시에는 밤나무만 담은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조명희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밤나무를 소재로 한편의 시를 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과 우주의 비밀이 이 시 속에는 담겨 있다.
조명희 선생의 조카인 조벽암 시인도 예사로운 분이 아니었다. 조명희 선생 형님의 아들인 조벽암 시인은 월북하지 않았다면 큰 문인이 되었을 분이다. 조벽암은 동네 이름을 빌려 자신의 호를 만든 분이니 고향사랑의 정도를 익히 짐작하여 볼 수 있다. 경성 제2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급격한 도심화.. 이제는 진천읍의 중심
포석문학공원을 뒤로하고 다시 수암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돌리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한 가운데 어느 음식점 귀퉁이에 힘겹게 버티고 서있다. 수령이 200년이 되었으니 조명희 선생이 고향 진천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까지 수십 년을 지켜보았으리라. 이 늙은 느티나무 아래 벽암리 수암마을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회관은 언제부터인가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었으나, 2011년 덕산면 용몽리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이곳으로 이주를 하여온 지금의 이규철 노인회장이 많은 노력을 하여 재정비를 하였다. 이제는 하루 2~30여명의 어르신네들이 모여 하루를 보내는 깔끔한 동네 사랑방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봉화산에서 내려다 본 수암마을(좌)과 수암 마을회관 옆 키 큰 느티나무(우)]
65세 이상의 어르신 만이 가입할 수 있는 노인회에는 가장 젊으신 77세부터 100세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며, 할아버지 6명에 할머님 회원은 20여 명이다. 이중에 박안호(87) 할아버지는 86년 째 거주하시는 토박이로, 200년간 5대째 조상대대로 수암마을에 살고 계시는 분이다.
1990년 이후 급격히 도심화가 진행이 된 수암마을이지만 그래도 중앙시장 주변 보다는 덜 복잡하다. 많은 군민이 이용하는 진천시외버스터미널도 1995년에 수암마을에 자리잡았다. 진천성모병원과 군립도서관은 행정구역 상 읍내리에 속한다. 전체 289가구이며 60명 회원의 “숫말 사랑계”가 조직되어 있다. 마을회관 지척에 청소년수련관이 최근에 문을 열었고, 조명희 선생을 기리는 조명희문학관이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우리동네 사람들
이규철 노인회장
이규철 노인회장(80세)은 2009년 수암마을로 이사오기 전에는 충북혁신도시 건설로 없어진 덕산면 두촌리에서 5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오셨다. 2000년 용몽리농요를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소개하여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이어서 충북무형문화재(제11호)로 등록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011년 이후 수암마을 노인회장에 임명되어 방치되어있던 마을회관을 재정비하여 현재는 매일 2~30명의 어르신들이 보람있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군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경로당으로 변모를 시켰다.
이제학 이장
지난달 25일 까지 9년간 진천군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한 이제학 이장(63)은 4년 째 수암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 열린 “조명희문학제“에 두차례 다녀왔다. 수암마을의 자랑거리는 “도심화가 되어 번잡하고 소란스러워졌지만 무척 살기 편하여 진 것이 사실“이라며, “도시마을치고는 주민들의 단합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자랑”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현안에 대한 물음에, “동네 중심도로가 차도∙인도 구분이 없어 보행인 들의 안전이 항상 걱정이 된다”며 조속히 안전한 도로로 정비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진천자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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