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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이월면 노원리-노곡마을] 예로부터 명당으로 불려온 유서 깊은 동네

뚝섬 2015. 3. 27. 16:23

진천읍에서 이월-광혜원면을 거쳐 이천으로 연결되는 17번 국도 좌측을 따라 한남금북정맥이 길게 늘어서 있다. 속리산에서 시작한 이 산줄기는 태령산-만뢰산-무제산-덕성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칠장산으로 이어진다. 그 중간의 무제산(573m) 아래에 자리한 노곡마을은 배산(무제산 줄기) 임수(멀리 미호천)의 마을조건을 갖추었지만 임수에 해당하는 미호천이 조금은 멀지 않나 싶다. 하지만 무제산 아래 자리한 노곡마을의 모습은 편안함 그 자체이다.


[논실마을(마을안쪽에서)]


평산 신씨 집성촌인 노곡마을은, 논실마을로도 불리우는데 본디 ‘논실’은 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라 한다(중원문화연구소 진천군 지명유래). 실제 이곳에는 마을 앞에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조선 선조 때 이곳 논실마을에 처음 세거(世居)한 독송재(獨松齋) 신잡(申磼)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신 곳이라 하여 노은실(老隱室)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노곡(老谷)’은 ‘노은실’의 ‘노’를 한자 ‘老 ’로 음차하고 ‘실’을 ‘谷’으로 훈차한 지명이라고도 하고 있다.


[논실마을(마을바깥에서)]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 초의 무신 신숭겸(申崇謙)으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룬 개국공신이다. 태조가 공산지역(지금의 공주 부근)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신잡은 시조 신숭겸의 20세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카가 이끄는 왜군에게 패하여 남한강에 투신 자결한 신립(申砬)장군의 4형제 중 맏형이다.


신잡의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며, 신잡은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우부승지를 거쳐 이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비변사당상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관내 철산군에 탈옥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593년 다시 기용되어 밀양부사·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特進官)·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0년에는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 겸 세자빈객이 되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빙고제조(氷庫提調) 등을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평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606년 개성유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에 진천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노은영당]


논실마을 뒤 무제산 자락에는 신잡을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 신화국과 그의 아들 신경희(申景禧)등 3대의 묘소가 마을을 내려다 보며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평산 신씨 집성촌은 근래에 접어들어 세손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마을 50여 가구 중 12가구 25명이 조상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신화국-신잡-신경희로 이어져 내려온 3대의 묘소]

 

신경희의 묘 바로 아래에는 노은영당(老隱影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영당에는 「신잡 영정」이 모셔져있으며 이 영정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선조 37년(1604)에 신잡 공의 54세 때 모습을 김이혁이 그렸다 한다. 비단 바탕에 색을 넣어 그린 전신상의 초상화인데 크기는 가로 90㎝, 세로 167㎝로 그림의 형태와 안면처리법 등이 조선중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 문화·사료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신잡영정: 충북 유형문화재 제45호]


노은영당에서는 매년 10월경 평산 신씨 종중 시제를 지낸다. 3~4년 전에 노은영당에 보관되어 있던 향로, 도자기 등 오래된 제기와 일부 문화재가 도난당하여 마을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노은영당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산자락 아래에는 1000년 정도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일대 68,968m2 지역이 천연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왜가리 번식지이다. 왜가리는 백로과에 속하는 큰 새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번식하며 정월대보름 쯤에 와서 가을 9~10월에 돌아가는 여름철새이다. 해마다 많을 때는 1000여 마리의 왜가리가 번식하였다고 하는데 요즘은 100여 마리 정도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수령 1000년의 은행나무. 근처가 천연기념물 왜가리의 번식지]


평산 신씨 집성촌인 논실마을은 신잡 공이 세거하며 형성된 마을이어서 역사가 족히 400년은 넘는 마을이다. 근래에 들어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한때 100여 가구의 마을이었는데, 최근 인구감소 추세와 자녀 교육문제 등 이농인구의 증가로 이제는 50여 가구로 줄었고 이나마 7~8채는 빈집이다. 전체 주민 수는 100여 명 정도. 고령화는 이 마을도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초-중생은 단 1명도 없고 고교생만 2명. 40대 아저씨가 동네 막내이고 8~90대 고령의 주민이 10여 명이나 된다.


주민의 주요 생업은 벼농사가 8가구, 낙농(젖소 원유) 2가구, 축산(한우) 1가구, 인근의 회사에 근무하는 주민이 10여 가구, 그 나머지는 외지의 자녀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소일을 하는 가구 들이다. 일반 벼농사가 대부분이며, 일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그 외 논실마을 출신인사로 조선말기의 무신이며 외교가인 위당 신헌이 눈에 띄며 마을 안에는 그가 살던 고택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헌은 고종 12년(1875) 병자수호조약, 고종 19년(1882)에는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던 분이다. 그가 살던 고택은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었고, 현재는 마을 토박이 방관석 씨가 거주하고 있다.


[신헌 고택]


최근에 은실마을 출향인사로 크게 눈에 띄는 인물은 없다. 마을에 대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나 1년에 한번 정도 마을주민이 모이는 정도이다. 1년에 한두번 농번기를 피하여 마을 주민이 나들이 삼아 여행을 한다고 한다. 주민들 모두가 조용히 평범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그야말로 ‘보통마을’이라고 신상철 이장이 말을 보탠다.



우리동네 사람들 

 

신현칠 이장(57)

평산 신씨 33세손으로 금년에 이장에 취임하였다. 마을에서 목장(낙농원유)을 하고 있는 신이장은 “마을의 머슴이자 심부름꾼으로 봉사를 하는 이장이 되겠다”고 이장으로서의 소감을 밝혔다. “마을의 유대와 화합을 위하고, 윗사람 들을 공경하고 아랫사람 들을 돌보며 마을의 단합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앞으로의 포부도 덧붙였다.


신상철 주민(60)

은실마을 토박이이자 평산 신씨 34세손인 그는 진천군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평산 신씨는 일명 ”논실 신씨“라고 한다며 남달리 종중을 아끼는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노은영당에 영정을 모신 신잡 공의 14세손으로 평산 신씨 가문의 가계도를 훤히 꿰고 있는 그는 마을이 세월이 흐르면서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최순녀 부녀회장(52)

금년 부녀회장이 되기 이전부터 마을 및 종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살림꾼이었다. 이장보다도 종중의 시제 올리는 기일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인터뷰 당일도 시설 애호박 뒤처리를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최근 마을 쓰레기를 치우는 등 청소작업을 함께하여 보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마을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부녀회장의 역할이 아니겠냐며 앞으로도 주민 들이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의 말을 전하였다.    -진천자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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