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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맹동면 마산1리 방가실] 전국 최고, 다올찬 맹동수박의 원조마을

뚝섬 2015. 9. 6. 16:50

“애들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이제는 먹고 살만 합니다. 수박농사가 일반 농사보다 10배 쉽습니다..

 

다올찬 맹동수박을 가장 먼저 재배하기 시작한 마산1리 주민의 말이다. 마을 입구에 ‘마산 수박 유래문’ 팻말이 서 있다. 1990년 음성군농촌지도소에서 지역에 맞는 소득 작목을 찾다가 지역 농가와 합심하여 하우스 수박 재배를 시작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삭아삭한 과육질이 일품으로 한번 맛을 본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맛, 전국 최고의 맛과 당도를 자랑하는 다올찬 맹동수박은 과피가 얇고 선홍색의 과육과 짙은 호피색의 무늬는 타 수박보다 월등한 차이를 보이는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과피에는 당도의 상징인 하얗게 분이 내리며, 평균 당도 12브릭스(Brix)를 유지하는 고품질의 시원하고 깔끔한 단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본래 수박은 노지에서 재배하면 장마에 농사를 망치는 일이 흔하며, 수박 껍질이 두꺼워 상품성이 떨어진다. 하우스 재배는 비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수확 시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껍질이 얇고 당도가 높다. 마산1리 주민들은 이 하우스 수박으로 승부를 걸어 성공하였다. 

 

[정석오 묘에서 바라본 방가실 마을. 성공적인 맹동 다올찬수박 재배로 마을 전체가 매우 풍요롭다]

 

수박 재배에 승부수를 띄우다

 

마산1리의 주요 자연마을은 방가실과 구방가실, 두 마을 46가구에 주민 수는 115여명이다. 이중 40가구가 수박재배에 종사하고 있다. 전국에서 출하되는 수박가운데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 최고경매가 1~3위가 전부 마산1리에서 출하된 수박 들이며, 연간 출하금액은 20억원을 상회한다.

 

수박을 재배하기 전에는 고추농사를 주로 하였으며, 농촌지도소에서 권유를 한 것이 수박재배로 전환한 계기라고 한다. 당초 마산1리와 같이 수박재배를 시작한 소이면의 한마을은 3년 만에 흐지부지되었지만 마산1리는 성공하였다. 마을이 청정지역에 지형이 높아 밤낮의 일교차가 타지역 보다 큰 5도 이상 되고, 토지의 배수가 잘 되는 점이 지역선정의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재배기간은 매년 3월 초에서 10월 말, 출하는 6월 중순~7월 중순과 9월 중순과 10월 말 까지 두 차례이다. 일반 논·밭농사에 비하여 노동의 강도도 10분의 1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다올찬 맹동수박은 여러 면에서 마을을 풍요롭게하는 그야말로 ‘복덩이’이다.

 

마산1리는 맹동면 중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함박산이 우뚝 서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한천천 지류가 흐른다. 본래 충주군 맹동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마운동(麻云洞), 신평리(新坪里), 매산리(梅山里)와 하본리(下本里), 봉암리(鳳岩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마운동과 매산리에서 이름을 따서 마산리라 하였다. 방가실(주민들은 방까실로 부르는데 마운동-栗枝洞에서 유래), 구방가실, 매산, 신평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매산, 신평에는 주민이 살지 않는다.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 방가실(밤까실)

 

마산리 46가구 중 26가구가 방가실에 거주하며, 옛날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구방까실은 방가실의 본 마을로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구방까실에서 봉현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세곡고개(세곡), 신평에서 쌍정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마산고개, 새터에서 봉현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새터고개 등이 있다.

 

농촌마을이지만 수박을 주로 경작을 하여서인지 주민 평균 연령층이 다른 마을에 비하여 월등히 낮고 젊은 세대가 많다. 노인회 회원기준인 65세 이상은 36명 뿐이며 4~50대가 대부분이다. 초중고 학생이 7명이나 된다. 수박농사 이외의 일반농사와 축사는 6가구, 그리고 독거가구가 6집이다.

 

마을의 특이사항으로는 동래 정씨 소유의 대지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마산1리 전체로는 40%, 특히 마을 중심 방가실은 80%가 동래 정씨 문중의 소유라고 한다. 그 유래는 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동래 정씨 문중의 정간(貞簡) 정석오(鄭錫五)의 묘에서 기인한다. 묘는 원래 경기도 과천에 있었으나 문중의 세손들이 거주하는 방가실로 이장하였다하며, 세손들은 당시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방가실 마을 뒷편에 자리한 정간 정석오 묘]

 

정석오는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으로 1746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1715(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수찬·교리·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는 동래 정씨의 세거지

 

1721(경종 1) 지평으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과 더불어 소론계열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탄핵하는 신임사화(경종 1, 1721~1722년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를 주도하였으나, 1725년 영조 즉위로 노론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2년 후 정미환국으로 세자시강원사서로 다시 기용된 뒤, 동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36(영조 12)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의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우의정에 특진, 곧 좌의정에 승진되고, 1748년 영돈녕부사로서 동지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던 중 병사하였던 분이다.

 

지영호 이장은 마을의 큰 현안문제는 없지만, 25년 전에 지어져 많이 낡은 마을회관을 신축하였으면 하는 바램과 건실한 기업체와 11촌의 인연을 맺어 수박으로 풍요로워진 마을이 인연을 맺은 업체와 더불어 작지만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우리동네 사람들:

 

많은 사회단체를 통한 봉사활동의 주역

지영호 이장(59):

지영호 이장 만큼 많은 사회단체 직함을 가졌던 사람도 드물다. 음성군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음성군자율 방재단 부단장, 맹동면자율방재단장, 맹동면 지역개발회 부위원장,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음성군지회장, 음성군체육회 이사 등 수 많은 사회단체 직함을 가졌었다. 현재는 음성군 지역자율방재단 단장을 맡고 있으며, 금년 이장에 취임했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으로 한때 청주에서 개인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20년 전 마산리가 좋아 정착하여 수박재배를 하고 있으며, 규모는 30동 규모. 동갑나기 이효자씨 사이에 13녀를 두고 있다.

 

마을 경로에 앞장서는 토박이

김우일 노인회장(75):

마산1리 토박이로 군복무와 잠시 서울에서 거주한 것 이외에는 마을 떠난 적이 없다. 담담한 성격으로 마산1 36명 노인회의 수장역을 맡고 있다. 오래 전에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3. 장남은 삼일회계법인 전무로 막내는 흥덕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으며, 4동 규모의 수박재배를 하고 있다.

 

맹동다올찬 수박 역사의 산 증인..

김광수 대동계장(67):

군대 3년 이외에는 마산1리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맹동 다올찬수박’ 초창기부터 작목반 총무로써 시범사업에 참여하였다. “우리 마을 이외에 또 다른 소이면의 한 마을도 사업에 참여하였지만 초창기에는 마산1리만 성공하였다”며 관계공무원의 지극정성으로 지금까지 큰 고생은 없었다고 했다. 성공적인 수박재배를 위하여 3년 간 파견 나온 공무원과 동고동락하였다. “아주 바쁠 때의 인력난 이외에는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는 그는 남매를 두었으며, 진천에 거주하는 아들과 더불어 30동 규모의 수박재배를 하고 있다.

 

마을 일에 앞장서는 젊은 일꾼

진의기 새마을지도자(53):

“농사는 정년이 없고, 더우기 앞으로는 젊은이에게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모직 스포츠마케팅의 직장을 접고 귀농하였다”는 그는 금년이 귀농 5년 차. 수박 재배 관련하여 배우고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15동의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2남 모두 대학에 재학하고 있다.

 

-음성자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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