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내린 담양 명옥헌]
[배롱나무꽃]
붉은 꽃 내린 담양 명옥헌
[윤주의 이제는 국가유산]
명승 담양 명옥헌 원림
설핏 잠들다 깨어도 그저 꿈결이지 싶은 곳. 이즈음의 명승 ‘담양 명옥헌 원림’이 그러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들러보니, 빗소리에 옥구슬 부딪치듯 흐르는 물소리 아득하고, 색 깊어진 배롱나무 붉은 꽃잎이 무리 지어 연못과 정자를 품고 있다. 붉은 꽃 내린 한여름의 명옥헌은 찬란하다.
배롱나무는 백 일 가까이 붉은 꽃을 피워 목백일홍으로도 불린다. 그렇게 ‘백일홍나무’가 ‘배기롱나무’라 불리다 ‘배롱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무색하다. 하지만, 붉은 꽃만 피는 것도 아니요, 한 송이만 내내 피는 것도 물론 아니다. 가지 끝 원추 모양 꽃차례에 작은 꽃들이 이어가며 석 달 열흘가량 피고 진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만발한 아담한 산자락,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곳에 살포시 명옥헌 원림이 자리하고 있다. ‘명옥헌(鳴玉軒)’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청아한 물소리가 옥구슬 울리는 소리 같아 불린 이름이다. 계류 옆 세월의 더께를 이끼로 두른 작은 바위엔 ‘명옥헌 계축’이라 새겨져 있다. 집안과 인연 있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전해지며 그 흔적은 명옥헌 현판으로도 올려져 있다.
명옥헌은 오이정이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명곡(明谷) ‘오희도(1583~1623)’를 기린 곳이다. 세상사를 잊고자 담양 후산마을에 은거한 오희도는 ‘망제’라 이름 지은 곳에서 책을 벗 삼아 노모를 모시며 ‘명곡 효자’로 불리며 지냈다. 아들 오이정과 후손들은 선대를 기리며 대대손손 효의 마음으로 명옥헌 원림을 가꾼 것으로 전해진다.
명옥헌 원림은 산의 중턱 기슭에 위치하여 계류를 자연스레 끼고 있다. 물줄기가 위쪽 작은 연못에도 흘러가고, 아래 큰 연못으로 모이는데 연못은 각각 섬을 품고 있다.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놓은 명옥헌에 올라 동서남북 모든 풍경을 들이는 것도 특별하다.
배롱나무꽃이 찬란한 지금도 좋지만, 지긋하게 자연을 품은 고고한 아름다움을 늘 만날 수 있다. 명옥헌에서 돌아와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사방 어디선가 꽃바람이 부는 듯하다. 짙게 드리워진 꽃 그림자에 마음을 실어 보내며 슬며시 눈을 감는다.
-윤주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조선일보(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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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꽃
올여름도 100일간 붉게 피어날 꽃
꽃망울, 팝콘처럼 터지며 꽃잎 펼쳐… 이름은 '百日紅나무'에서 유래
'魂 빼는 아름다움' 예부터 극찬
한여름 뙤약볕 견디며 열매 맺는 묵묵한 강인함, 이땅 아버지들 닮아
'그들은 단연코 그 모든 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만큼 품격이 있었다. 보는 이 없는 폐교의 운동장을 여름 내내 지키고 있었을 배롱나무였다. 꽃잎들이 하롱하롱 지고 있었다. (…) 균형 잡힌 좌우대칭이 미학적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 위에서 수많은 꽃이 막 떠오르는 우주선처럼 장중한 타원을 이루고 있었다.'
박범신 장편소설 '소금'에서 남자 주인공이 시우를 처음 만난 것은 배롱나무 그늘 아래였다. 소설은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 때문에 가출한 시우의 아버지 선명우, 끝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한 선명우의 아버지, 자식을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부두 노동자로 살다 숨진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 등을 대비시키면서 권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양 의무에 시달리는 요즘 아버지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이 소설에서 소금과 함께 주요 소재이자 아버지의 상징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어릴 때 선명우가 부모를 그려 오라는 숙제에 아버지의 상징으로 그린 것도 배롱나무였다. 한여름 내내 뙤약볕에 굴하지 않고 붉은 꽃을 피우고 기어이 열매까지 맺어내는 배롱나무의 강인함은 처자식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 모습과 닮았다.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서울 도심 여기저기서도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배롱나무는 약 100일간 붉은 꽃이 핀다는 뜻의 '백일홍(百日紅)나무'가 원래 이름이었다. 그러다 발음을 빨리하면서 배롱나무로 굳어졌다. 꽃 하나하나가 실제로 100일 가는 것은 아니다. 작은 꽃들이 연속해서 피어나기 때문에 계속 피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멕시코 원산의 '백일홍'이라는 1년생 식물은 따로 있다. 원래는 주로 충청 이남에서 심는 나무였으나 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에서도 월동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도, 특히 최근 조성한 화단에서 배롱나무를 흔히 볼 수 있고 용산구 원효로와 구로구 등에는 가로수로 심은 배롱나무까지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많은 나무라서 '소금' 외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이문열의 장편 '선택'에서도 배롱나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다. 이 소설은 조선 사대부가(家) 여인의 전형적인 삶을 산 장계향(1598~1680)의 일대기를 다룬다. 처음 시댁에 도착한 장씨를 맞은 것은 배롱나무였다. '중문을 들어설 때쯤이었을까. 그 총중에도 무언가 날카로운 빛살처럼 내 눈을 찔러왔다. 움찔하며 곁눈으로 가만히 살피니 안마당 서쪽 모퉁이에 서 있는 한그루 자미수(배롱나무의 중국식 이름)였다.' 배롱나무는 장씨가 시집온 재령이씨 가문의 꽃이었다.
정지아의 단편 '행복'은 아직도 정세 판단을 위해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빨치산 출신 부모와 함께 어머니 고향에 다녀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배롱나무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고향을 상징하고 있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남해로 내려갈 때,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꽃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의연하게 계절을 반복하는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배롱나무는 불타는 듯 붉은 꽃이 나무 전체를 뒤덮는다. 멀리서 보면 마치 진분홍 구름이 내려와 머무는 것 같다. 꽃을 자세히 보면 다닥다닥 달린 콩만 한 꽃망울이 팝콘처럼 터져 꽃잎과 꽃술을 넓게 펼치는 형태다. 한개의 꽃에 6개의 꽃잎과 30∼40개의 노란 수술, 1개의 암술이 달려 있다. 꽃잎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이 지은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이 꽃에 대해 "비단 같은 꽃이 노을처럼 곱게 뜰을 훤히 비추면서 사람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배롱나무는 꽃만 아니라 수피(樹皮)도 특색이 있다. 껍질의 얇은 조각이 떨어지면서 반질반질한 피부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나무 표피를 긁으면 간지럼 타듯 나무가 흔들린다고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는 정말 간지럼을 타는 것일까. 배롱나무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린다. 그래서 실제로는 사람이 간지럼을 태우기 위해 나무에 다가갈 때 이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 일본에서는 표면이 너무 매끈해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원숭이 미끄럼나무'라 부른다.
배롱나무는 예부터 청렴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져 서원과 서당 등에 많이 심었다. 선비들이 '개인의 영달이나 처자식 때문에 신념을 굽히게 될지도 모를 자신을 미리 경계하느라' 뜰에 곧고 담백한 배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서울시청 다산공원 입구에도 이 나무를 심어놓았다. 담양 명옥헌 원림(園林), 고창 선운사, 안동 병산서원 주변, 부산 양정동 동래정(鄭)씨 시조묘의 배롱나무도 유명하다.
배롱나무는 9월까지 여름 내내 우리 곁에서 진분홍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배롱나무를 보면 한 번쯤 다가가 팝콘처럼 터지는 꽃을 유심히 살피면서 이 땅 아버지들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김민철 사회정책부 차장, 조선일보(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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