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野(草·木·花)]

[용담, 혜곡 최순우가 사랑한 산꽃] [과남풀-구술봉이]

뚝섬 2023. 9. 22. 10:26

[용담, 혜곡 최순우가 사랑한 산꽃]

[과남풀]

 

 

 

용담, 혜곡 최순우가 사랑한 산꽃

 

[김민철의 꽃이야기]

 

요즘 야생화를 보러 다니다보면 산 가장자리 등 양지바른 곳에서 종 모양의 보라색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꽃이 꽃잎을 활짝 벌리고 있다면 용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을 오면 못견디게 용담꽃 피는 언덕 생각”

 

혜곡 최순우(1916~1984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한국미 사랑을 담은 산문집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읽다가 이분이 우리 문화재를 아낀 것 못지않게 우리 야생화도 사랑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책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짝을 이룹니다. 그는 우리 야생화 중에서도 용담을 가장 좋아했는데, 산문집에 ‘그리워서 슬픈 나의 용담꽃’이라는 글까지 있습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들꽃이나 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정원에서 가꾸는 목련꽃·모란꽃·장미꽃·글라디올러스·코스모스·달리아 같은 화려하고 기름져 보이는 꽃들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오히려 산배꽃이나 산수유꽃 같은 산나무들의 조촐한 꽃차림이나 산에 피는 파리한 가을 꽃들에 마음을 쏟는다. 예를 들면 용담(龍膽)이나 ‘달개비꽃’ 같은 하찮은 꽃들 말이다.>

 

용담. 꽃잎이 펼쳐지며 진한 보라색으로 피는 꽃이다. 뿌리를 약으로 쓴다.

 

산꽃이란 단어의 어감이 참 좋습니다. 산배꽃은 산에 피는 돌배나무·콩배나무 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용담을 ‘해마다 9월이 오면 시들기 시작하는 큰 산기슭의 풀밭 속에 드문드문 숨어 피어 그 결곡한 생명을 파아란 불꽃처럼 남몰래 불태우며 끝내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스러져 가는 호젓한 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나는 오랫동안 이 꽃에서 슬픔의 의미와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배워 왔다”고 했습니다.

 

용담은 전국에서 자라는데, 그렇게 흔하지도 드물지도 않은 야생화여서 관심을 갖고 보면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혜곡은 이 글에서 오대산 상원사에서 묵으면서 용담꽃을 찾아다닌 일화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용담꽃을 찾아 헤매다 ‘듬성듬성 억새 우거진 초원에서 드디어 용담꽃 언덕을 발견’했을 때 ‘사뭇 신비롭고도 청정한 파아란 꽃색과 순리대로 늣늣이 피어난 청초한 꽃모양을 보면서 과연 산기(山氣)의 슬기로움을 역력히 보는 듯 싶었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용담꽃은 향기도 매무새도 뽐낼 줄을 모르면서 이 9월에도 아마 그 언덕 위에 숨어 피었을 것”이라며 “가을이 오면 나는 못견디게 그 용담꽃 피는 언덕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용담. 가을에 다섯 갈래로 갈라지며 진한 보라색으로 피는 야생화다.

 

혜곡의 용담 사랑은 마른 꽃까지 두고 볼 정도로 유별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꽃의 마른 꽃가지마저 나는 좋아한다”며 “용담이나 억새 같은 마른 꽃가지를 길게 꺾어다가 백자 항아리에 꽂아 놓고 한겨우내 바라보면 싱싱하게 살아 있는 꽃가지보다 더 속삭임이 절실해서 마음이 늘 차분하게 가라앉는 까닭을 알 듯도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최순우옛집에도 용담 한뿌리 심었으면

 

높은 산 가을 야생화는 유난히 보라색이 많은데, 용담은 과남풀과 함께 대표적인 가을 보라빛 꽃 중 하나입니다. 가을 야생화의 보라색은 진하면 진한 대로, 연하면 연한 대로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용담은 초가을부터 늦게는 11월까지 종처럼 생긴 꽃을 피웁니다. 줄기와 잎 사이에 여러 꽃송이가 모여 달리는데, 꽃은 다섯 갈래로 갈라지며 진한 보라색으로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용담은 뿌리를 약으로 쓰는데, 뿌리의 쓴맛이 웅담보다 더 강하다고 용담(龍膽)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용담은 꽃잎을 활짝 벌리고 있어서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과남풀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꽃잎만 봐도 용담과 과남풀을 구분할 수 있지만, 꽃받침조각이 붙은 형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꽃받침조각이 용담은 수평으로 젖혀지는데 과남풀은 딱 붙어 있습니다.

 

과남풀은 청색에 가까운 보라색 꽃이 핍니다. 늘 꽃잎을 오므리고 있어서 아직 덜 피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늘 그 상태입니다. 햇빛이 좋을 때나 약간 벌어지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벌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면서 잘도 들락거립니다. 용담은 높이 20~60cm로 무릎높이 정도까지 자라지만, 과남풀은 조금 크게 높이 50~100cm 정도로 곧게 자랍니다.

 

(좌) 설악산 과남풀/(우) 구슬붕이. 봄에 연보라색으로 피는 꽃이다.

 

과남풀과 용담은 가을꽃이지만, 이른 봄에 작지만 용담 비슷하게 피는 꽃이 있습니다. 구슬붕이입니다. 정말 작아서 한 손가락 두마디 정도 높이로 자라 꽃이 핍니다. 연보라빛 구슬붕이 꽃송이들이 하늘을 향해 피어나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귀엽습니다.

 

혜곡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를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런 혜곡이 우리 것의 일부인 야생화를 사랑하고 아낀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지난 주말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옛집에 가보았습니다. 혜곡이 1976년부터 1984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산 곳입니다. ‘튼ㅁ형’ 한옥 곳곳에서 자연스럽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혜곡의 안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벌개미취·산국 등 우리 꽃과 신갈나무·생강나무 등 우리 나무들이 있긴 했지만 혜곡이 가장 사랑한 용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양지바른 곳에 용담 한뿌리 심는 것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닷컴(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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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남풀

 

수줍게 오므린 청보랏빛 꽃잎… 늦여름에 피어 가을 소식 알려

 

거의 항상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과남풀 꽃. 청보라색 꽃은 늦여름부터 가을 막바지까지 피어요. /김민철 기자

 

경기 가평에 있는 화악산 등에 과남풀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과남풀 꽃은 늦여름 피기 시작해 가을의 시작을 알립니다. 청색에 가까운 청보라색 꽃은 언제 보아도 세련미가 있습니다.

과남풀은 용담과(科) 여러해살이풀로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약간 깊은 산이나 풀밭에 가야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높이는 50~100㎝ 정도로 대부분 곧게 서 있습니다. 꽃이 예뻐서 꽃다발이나 꽃꽂이에도 많이 쓴다고 합니다.

과남풀 꽃의 특징은 거의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직 덜 피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늘 그 상태입니다. 햇빛이 좋을 때는 약간 벌어지기도 합니다. 저렇게 꽃잎을 오므리고 있으면 벌이 어떻게 들어가나 생각했는데, 한번은 제법 큰 벌이 자연스럽게 몸을 틀면서 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곤충이 과남풀 꽃 속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숙박비는 꽃가루를 옮겨 주는 것으로 치르겠지요. 곤충들이 자고 갈 경우 꽃가루받이 성공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고 합니다.

과남풀 잎은 마주 달리는데, 긴 타원 모양으로 길쭉하고 끝이 뾰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희미한 잎맥이 3~5개 있고, 잎 가장자리는 밋밋합니다. 잎자루는 없고 밑부분이 줄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예전엔 칼잎용담과 큰용담을 구분했는데, 현재는 과남풀로 통합됐습니다. 과남풀이란 이름은, 관음초(觀音草)로 부르던 것이 관음풀로 변하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과남풀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용담은 과남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약간 다릅니다. 우선 꽃이 진한 보라색이고, 보통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과남풀과 달리 용담은 꽃잎이 활짝 벌어져 뒤로 젖혀 있습니다. 꽃받침조각도 용담은 수평으로 젖히는데, 과남풀은 딱 붙어 있습니다. 과남풀은 대체로 높은 산지에서, 용담은 낮은 산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용담이라는 이름은 뿌리의 쓴맛이 웅담보다 강하다고 해 붙었다고 합니다.

과남풀과 용담처럼 산에서 만나는 가을 야생화는 유난히 보라색이 많습니다. 가을 야생화의 보라색은 진하면 진한 대로, 연하면 연한 대로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가을 야생화에 보라색이 많은 이유가 있겠지요? 보라색은 곤충 눈에 잘 띄는 색이라고 합니다. 곤충의 활동이 제한적인 가을에는 이들 눈에 잘 띄는 색으로 꽃이 피어야 유리하겠죠. 꽃 색 하나에도 식물의 전략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권정생의 소설 '몽실 언니'는 6·25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돌보는 몽실이 이야기입니다. 소설엔 몽실이가 초가을 산들바람이 불 때 동생 영순이에게 주려고 '댓골 가는 고갯길에서 과남풀 꽃'을 따 모으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산길을 걸을 때 보라색 꽃이 보이거든 혹시 과남풀 아닌지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김민철 기자, 조선일보(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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