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영월] 559년 전 청령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뚝섬 2016. 8. 31. 12:56

소년 임금 살인사건과 영월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평온하게() 지나가는() , 영월(寧越)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한번 들어가면 큰 화() 없이 무탈하게 살 수 있는 땅이다. 하나 559년 전 열일곱 먹은 소년이 영월에 가고 살고 죽은 내력은 그 누가 보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소년 발걸음 닿은 곳은 빠짐없이 21세기 관광지요, 인문 기행 목적지가 되었다. 소년 이름은 이홍위요, 그가 죽고 나서 200년 뒤 붙은 이름은 단종이다.

 

강원도 영월과 이홍위, 노산군, 단종

1457 6 22(이하 음력)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내시 안노를 화양정으로 보내 영월로 떠나는 조카 홍위를 배웅했다. 자기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멀쩡하게 임금으로 있는 눈엣가시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앉히고 왕이 된 지 햇수로 3년 만이다. 그 전날 세조는 조카를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유배를 명했다. 화양정은 지금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있던 정자다. 세종 임금이 만들고 이름 지은 정자다. 1911년 큰 벼락을 맞고 부서져 터만 남아 있다. 나흘 뒤 세조는 형수이자 노산군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묘를 파헤쳐버렸다.

 

어미 묘가 어찌 됐는지 알 턱 없이, 열일곱 살 소년은 양주·양평·원주를 거쳐 일곱 날 만에 영월에 도착했다. 주천을 지나 영월로 들어가는 입구 배일치 고개에서 소년은 서쪽 한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영월에 다다르자 큰 고개가 나왔다.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군졸 쉰 명은 노산군을 서강 건너 청령포에 가뒀다. 궁녀들도 함께였다. 서강이 360도 휘어들고 한쪽은 절벽인 담벼락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고른 사람은 영월 수령을 지냈던 신숙주였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서강이 석회암 지대를 흐르며 만든 물돌이동이다. 559년 전 이 절경 속에 열일곱 살 먹은 소년 이홍위, 단종 임금이 두 달 동안 유배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



수양대군에 왕위 뺏긴 어린 임금 단종
영월 유배 넉 달 만에 사약 받고 시신은 버려져


세조는 옷 열 벌을 보내고 사시사철 제철 과실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도 했다. 청령포에 우물이 없다고 하니, 우물도 급히 뚫으라 자상하게 지시도 했다. 매달 영월 수령에게 조카 문안을 드리라고 엄명도 내렸다. 가뭄이라 전국에 술을 금했으나 청령포만큼은 술을 바치도록 일러두었다. 석 달 뒤 역모를 계획하던 금성대군 무리가 발각됐다. 10 21일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 죽었다. 나라에서는 예로써 장사 지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실록에 세조 3 6 22일부터 10 21일까지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은 하나같이 단종이 1457 10 24일 사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고 있으니, 실록 기록자는 단종의 죽음을 사흘 전에 예언했다는 말인가. '예로써 장사 지냈다'는 기록 또한 세간에 전하는 기록과 영월 땅에 남은 흔적으로 볼 때 터무니가 없다. 역사는 기록이고 거울이며 교훈이며 반(
)교훈이다. 그릇된 기록은 교훈도 반교훈도 될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하는 고명진


-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 고명진.

 

1980년대 이래 고명진은 최루탄을 맞고 살았다. 1984년부터다. 고명진은 사진기자였다. 주간시민, 경향신문, 선데이서울, 한국일보, 통신사 뉴시스까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고명진은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했다.

은퇴했으면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동무들과 앉아서 음풍농월하는 인생도 즐거웠겠다. 그런데 기록하는 습성은 떨쳐내지 못해서 은퇴 이듬해 고명진은 현역 때 그러모아 둔 온갖 기록 싸 들고 영월에 내려와 미디어기자박물관을 열고 말았다.

기억하는가. 1987 6월 부산에서 대형 태극기 앞을 웃통을 벗고 뛰어가며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던 사내 사진을. 비폭력을 상징하는 이 사진은 1999 12 31일 미국 AP통신사가 발표한 '금세기 최고 사진 100'에 선정됐다. 이 사진을 비롯해 그가 민주화 시위 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명진이 말했다. "역사는 기록이다. 거대한 역사가 전부가 아니다. 작고 세밀한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나는 그 역할을 했다." 겁에 질린 노인의 눈망울, 돌멩이를 쥔 대학생의 주먹이 역사라고 그가 말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현역 시절 쓰던 카메라, 필름, 신분증, 출입증, 동료가 기증한 출입국 기록, 신문, 완장, 고명진이 촬영한 역사적 사진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근 유행 중인 드론 촬영 교육도 하고, 사진을 통해 초등학생들에게 잔잔하되 거센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영월에, 왜 박물관인가. 그가 말했다. "원래는 단양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누라 친구가 영월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문 닫은 박물관이 두 곳 있다는 게 아닌가. 귀신한테 홀렸다." 장터에 가다가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단양으로 가려던 고명진의 발길은 잠시 영월에 멎어 있다.

 

-강이 만든 ‘한반도 지형’. 이 지형이 있는 땅 이름은 한반도면이 됐다.

 

박물관 옆에는 서강이 흐른다. 서강에는 한반도 생김을 똑 닮은 물돌이동이 있다. 서강이 360도 휘돌면서 만든 지형이다. 영월 땅은 지질이 석회암이다. 물살이 땅을 갉아내며 흘러가 그런 지형을 만들었고, 그걸 용케 찾아내 사람이 몰린다. 사람이 몰리니 돈이 몰리고, 그리하여 2009년 박물관이 있는 서면(西面)은 한반도면(韓半島面)으로 공식 개명했다.

방랑 시인이 잠든 영월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랬다. 홍경래의 난 때 역적질을 한 할아버지 탓에 파락한 집에서 태어난 삿갓 김병연(1807~1863)은 고향 경기도 남양주를 떠나 황해도로, 강원도로 떠돌았다. 영월에서 살면서 장가도 가고 아들도 낳았지만 역적 집안이요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보인 모멸감에 팔도를 떠돌았다.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고, 손길 가는 대로 시를 썼고, 눈길 가는 대로 여자를 건드리고 파락호로 살았다. 그러다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죽었는데, 3년 후 그 아들 익균이 시신을 모셔 와 묻은 곳이 바로 영월이었다.

 

-김삿갓면에 있는 방랑시인 김삿갓 묘.

 

불과 150년 전 이야기이나 세간에서는 망각됐던 삿갓은 영월 사학자 박영국에 의해 부활했다. 김삿갓을 찾아다니던 박영국은 1982년 영월 창절서원 원장인 안동 김씨 김영배를 만났다. 그가 박영국에게 말했다. "우리 증조부가 한양 가서 김병기라는 친척을 만났지. 그 친척이 김병연 삿갓 묘가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사이에 있으니 돌봐달라고 했대." 그리하여 1982 10 24일 박영국과 김영배는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 영월과 영춘 사이 좌표를 찾아 헤매다 와석골에서 무덤과 생가 초석과 기둥을 발견했다. 그때 3대째 살고 있던 와석골 이장이 이리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삿갓 무덤이라고 알고 있었고, 왜정 때 이미 일본 기자들이 여러 번 다녀갔어." 지금 김삿갓 무덤이 있는 계곡은 김삿갓계곡이 되었다. 계곡이 있는 하동면은 김삿갓면이 되었다.

청령포와 엄흥도와 정사종

, 다시 단종 이야기다. 청령포로 유배된 지 두 달 뒤 폭우가 쏟아졌다. 궁녀 6명과 섬 아닌 섬에 갇힌 소년 모습을 상상해보자. 죽음은 예견된 운명이지만, 익사는 아니었다. 한양을 향한 서쪽 절벽까지 올라가 크게 울어도 보고 두 갈래로 갈라진 거송(
巨松)에 앉아 울어도 보았지만 하릴없었다. 유배 두 달 만에 노산군은 읍내에 있는 객사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다시 두 달 만에 사약을 받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찌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을 수 있으랴. 어찌 스스로 목을 매 죽을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하여 '공명심에 불타는 하인이 숨어 있는 소년을 찾아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말이 나왔다. 사인은 불명이지만 최소한 실록처럼 자살은 아니었다.

 

-소년 임금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

 

실록에는 "스스로 죽었다"
"
예를 갖춰 장례 지냈다
"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
작고 정직한 기록이 역사"

 

예로써 장사를 지낸 것도 아니었다. 얼어붙은 서강변에 버려진 시신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날 밤 엄흥도라는 영월 하급 관리와 영월 유배 소식에 군위현감으로 있다가 영월에 와 있던 정사종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에 넣고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가 지게에 관을 지고 한 언덕 위에 묻으니, 이 무덤이 200년 뒤 숙종 때 단종 왕으로 복위시키며 지금 보는 장릉이 되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왕실 정통성에 결정적 흠집인 단종 사건은 이때에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숙종은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어제시(
御製詩)를 영월 땅에 내려주었다. 시를 현판으로 내건 정자는 사라졌고, 이후 영조와 정조가 잇따라 글을 덧붙여 내리니, 지금 영월 초입 요선정에서 그 현판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소년 이홍위, 영월과 단종에 얽힌 이야기다.

 

[영월 여행수첩]



〈여행 순서〉

1.
요선정: 반드시 강물 아래 요선암을 둘러볼 것. 정자에 붙은 세 임금의 현판도 의미 있음.

2.
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 관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을 것www.ywmuseum.com, 5000. 월·화 휴관.

3.
한반도 지형: 숲 속으로 난 오솔길 즐기기.

4.
선돌/소나기재: 선돌 앞에 주차장. 소나기재 내리막길이 낭만적.

5.
장릉/관풍헌: 왕릉 어귀에 있는 정령송의 애틋함.

6.
청령포: 관음송이 주는 먹먹함. 도선료 3000.

7.
김삿갓계곡: 무덤 앞 시비 공원과 위쪽 생가. 하루 나들이라면 김삿갓계곡은 일찍 해가 지니 서두를 것.

〈맛집〉 주천면에 있는 다하누촌.

〈여행 정보〉 영월 관광 사이트www.ywtour.com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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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산(馬垈山)(강원영월): 김삿갓을 만나다..   http://blog.daum.net/cgan14/253

태화산(太華山)(충북 단양-강원 영월): 남한강 휘감아 도는 묵직한 육산..   http://blog.daum.net/cgan14/1012

김삿갓   http://blog.daum.net/cgan14/2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