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인제] 구룡령과 조침령을 넘어 우리는 방태산으로 숨었다

뚝섬 2016. 8. 10. 07:48

방태산 순환드라이브와 정감록 사람들

세상 피해 은둔한 사람들 모여 살았던 방태산 자락
깊은 계곡과 고개 지나는 110km 순환 드라이브
숨어든 사람들이 만든 은행나무숲… 펜션마을…
방태산 깊은 산중에는 '이 폭포 저 폭포'
別有天地非人間

 

풍수학자 최창조는 충격을 받았다. 전화(戰禍)를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황해도에서 경북 풍기로, 풍기에서 신도안으로 떠돌다가 충남 공주 명당골에 자리 잡은 노인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자본(資本)이 명당이외다. 돈만 많다면 아들 사는 도시로 나가 살지 미쳤다고 여기에서 살겠나." 예언서 '정감록'에 의지해 피장처(避藏處)를 찾아 팔도를 떠돌았던 노인이 칠순 넘어 털어놓은 비밀이었다. 최창조가 묻는다. "전쟁이 태평성대와 난세(亂世)를 가르는 기준이던 시절, 사람들이 전쟁을 피할 곳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산골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방태산과 피장처


강원도 방태산 주변에는 '정감록'에 나오는 피장처가 많았다. 방태산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20세기 말까지도 그랬다. 북쪽으로 418번 지방도와 남쪽으로 56번 국도가 방태산 언저리를 지나가지만, 방태산을 잇는 조침령과 구룡령은 섣불리 넘어갈 수 없는 아득한 고개였다.

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하려고 이 오지로 숨어들었다. 80종이 넘는 '정감록' 판본 가운데 필사본 하나가 방태산 주변 피장처를 삼둔사가리라고 불렀다. 홍천에 있는 살둔, 달둔과 월둔, 인제에 있는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다. 달둔에 사는 한 노인이 말했다. "정감록? 허… 나 젊을 때 울진에서 무장공비가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우리가 몽땅 강제로 쫓겨났었는데."


-강원도 인제와 홍천에 걸쳐 있는 방태산은 꽃 방()에 별 태(), 꽃별산이다. 그 산중에 숨어 있는 폭포 이름은 ‘이 폭포 저 폭포’다. 세상이 어찌 됐든 개의치 않겠다는 달관한 작명(作名)이다.

 

천지가 개벽했다. 자본과 돈이 전쟁을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418번 지방도가 산 북쪽으로 뚫리고 56번 국도가 남쪽으로 양양까지 뚫렸다. 2006 12월 진동과 양양을 잇는 조침령 터널이 뚫리면서 마침내 방태산을 한 바퀴 도는 110㎞ 길이 순환 드라이브 코스가 완성됐다. 길 막히지 않는 날, 두 시간 반이면 서울에서 닿는 신천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정감록' 피장처라 주장하는 숨은 장소들을 찾아가 돈을 뿌리고 대신 휴식을 구입한다. 땅은 변함없으되 그 쓰임과 용도가 이리도 격변했으니, '정감록' 예언이 21세기에 실현된 게 아닌가.

이 여름날 큰 산 방태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살둔계곡, 미천골계곡, 구룡령, 조침령, 진동계곡, 방동계곡. 이름 하나하나 의미심장한 은둔지들을 만나본다. 은둔지를 잇는 길도 하나같이 아름답다.

인제 상남에서 살둔까지 20

상남면에서 살둔계곡까지 자동차로 30분이 걸린다. 도로 번호는 446번 지방도다. 미산계곡이 길 내내 뻗어 있다. 내린천이 휘돌아 흐르는 첩첩산중에 평평한 땅이 보인다. 누가 보아도 정감록을 떠올릴 풍경이다. 오지였던 시절, 살둔에 있는 산장은 산꾼들 아지트였다. 한옥도 일옥도 아닌 희한한 목조 산장에서 사람들은 풍월을 읊고 놀았다. 길이 뚫리고 누구나 살둔을 찾는 지금, 산장은 만인을 위한 펜션으로 변했다. 야영장으로 변한 폐분교 주변에 차를 대고 계곡을 즐겨본다.

살둔에서 구룡령까지 25

구룡령으로 가는 길목 13㎞ 지점에 칡소폭포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다. 폭포 위쪽은 을수계곡이다. 내린천 발원지다. 여름에도 나무 그늘이 시커멓고 물은 냉수다. 폭포 앞에서 내린천과 계방천이 만난다. 차갑기 그지없는 내린천 줄기에서 양지바른 계방천 줄기로 몸을 옮기면 순간 온탕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빠진다. 칡소폭포에서 2.5㎞를 가면 홍천 내면이 나온다. 내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달둔계곡이다. 역시 정감록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홍천 내면 광원리에 있는 칡소폭포. 56번 국도와 붙어 있다.

 

영동고속도로에 교통량을 빼앗긴 후 56번 국도는 쓸쓸했다. 2010년 이 달둔계곡에 숨어 있던 은행나무숲이 대중에 개방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아내 병 고치러 달둔을 드나들던 사내 류기춘이 아예 은행을 심고 살다가 20년 만에 개방한 숲이다. 10월만 되면 달둔계곡 앞뒤 10km에 차량 사태가 나고 전직 금융인 문제경 부부가 숨어들어와 만든 펜션 티롤에서 은행나무숲까지 길섶에 장터가 선다. 다른 계절에도 아름답다. 내린천이 흐르는 계곡 풍경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동일하다.

길이 서서히 상승한다. 구룡령으로 간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고개를 과장해서 아홉 구비라 했다. 아홉 구비가 훨씬 넘지만, 고개 이름을 십룡령, 이십룡령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구룡령을 넘는 56번 국도 구간은 일제 강점기 임도였다. 그 길을 포장해서 1990년대에 완공된 도로가 56번 국도다. 고개를 넘을 때는 가랑비가 뿌렸으면 좋겠다. 고개 아래는 비가 오지만 고개는 운무에 뒤덮인다. 양편 그리고 앞뒤 산자락이 운무에 사라진다. 그 몽환(
夢幻), 잊기 힘들다.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25

구룡령 아래 마을 이름은 갈천이다. 화전민들이 칡뿌리 갈아 먹던 마을이라 개울에도 칡가루가 부유했다. 그래서 갈천(
葛川)이었다. 마을에 있는 약수 이름도 갈천이다. 약수터로 오르는 1.5㎞ 산길은 꼭 올라가 본다. 온갖 활엽수에 에워싸인 약수터는 신비하고 춥다. 교통량이 줄어들면서 구룡령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미천골 휴양림은 빼놓을 수 없다. 입구에서 7㎞까지 차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계곡이다. 입구에 있는 절터는 선림원지다. 절집 사람이 하도 많아서, 밥을 할 때마다 계곡수가 하얗게 됐다고 미천(
米川)이다. 휴양림 안에는 예쁜 펜션도 많고 밥 먹을 식당도 있다.

미천골에서 나와 서림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길은 418지방도로 바뀐다. 조침령이 나온다. 새도 하룻밤을 자고 넘었다는 악명 높은 고개다. 그 고개 아래에 터널이 뚫렸다. 2006년 일이다. 방태산 자락이 1145m짜리 터널 하나로 순환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양양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야 했던 진동마을 사람들은 신천지를 맞았다.

조침령에서 방태산 18

피장처를 찾아 진동마을 두메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비보(
悲報)였다. 조침령은 마지막 남은 오지였다. 언론, 방송 할 것 없이 진동계곡을 찾아 '천혜의 비경'을 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쉰여섯 먹은 사내 김시륜은 서울에서 사륜구동차를 타고 물 좋은 계곡만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23일 동안 계곡에서 내 손으로 밥을 해먹은 적이 없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밥이며 삼겹살을 나눠줬다. 대한민국, 아직 살 만하다." 김시륜의 담배연기 너머 물가에서 청년들이 꺽지 낚시에 한창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속에서 웃음소리가 끝이 없었다.

 

-진동계곡 솔밭 옆 내린천에서 만난 낚시꾼들.

 

문득 방태산이었다. 이 모든 현대판 피장처를 품고 있는 큰 산이었다. 계곡 끝에 폭포수가 쏟아졌다. 10m 높이 위쪽 폭포와 3m 높이 아래쪽 폭포를 합쳐서 '이 폭포 저 폭포'라 부른다. 휴양림 입구에 있는 방동약수를 한 모금 마신다. 음나무 무성한 숲 속에 철분 가득한 탄산수를 마신다.

방태산 옆 고향집에는 최균택과 박순옥 부부가 산다. 예순여덟 살 먹은 최균택과 세 살 연하 박순옥은 인제군 현리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리고 혼인을 하여 지금껏 현리에 산다. 박순옥이 만드는 두부가 하도 맛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호들갑이라, 25년 전 집에 두부집을 열었다. 그 이름이 '고향집'이다. 두부 싫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들도 이 집 두부를 먹고 나면 맛있다고 호들갑이다. 개명천지가 아닌 주술의 시대였다면 "인육(
人肉)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떠돌 법할 정도로 맛있다.

110
㎞ 방태산 자락 끝에서 두부 만드는 부부를 만났다. 현리에서 태어나 현리에서 자라나 현리에서 사랑을 하여 현리에서 혼인을 했고 현리에서 늙어가는 부부다. 그들에게 '정감록'은 덧없고 의미 없다. 하여, 묻는다. 당신의 피장처는 어디인가.

 

[방태산 여행수첩]



〈드라이브 순서〉


상남면-살둔계곡-칡소폭포-티롤-갈천약수-미천골자연휴양림-조침령-진동계곡-방태산자연휴양림-방동약수-고향집

〈볼거리〉

1.
칡소폭포: 주차장 반대편으로 개울 내려가는 길. 개울 물놀이도 가능.

2.
갈천약수: 구룡령휴게소 건너편 마을 소로로 들어갈 것. 산길 1.5.

3.
미천골휴양림: 발굴 작업 중인 휴양림 초입 선림원지 석탑을 볼 것. 휴양림 길이는 7.

4.
방태산휴양림과 방동약수: 휴양림 끝 '이 폭포와 저 폭포'. 방동약수는 휴양림 입구에서 왼쪽 도로.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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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태산(芳台山)-깃대봉(강원인제): 시원한 계곡과 드넓은 초원...   http://blog.daum.net/cgan14/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