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화순] 바위 속 根源을 찾아 화순으로 갔다

뚝섬 2016. 7. 20. 07:49

고인돌이 있는 화순과 소설가 정찬주

고개 초입 바위 따라가니 고인돌이 무려 596
방랑시인 김삿갓은 적벽 아름다움에 취해 화순땅에서 말년 보내

주자 증손자 주잠이 박해 피해 망명한 땅

화순 사는 소설가 정찬주 "
隨處作主立處皆眞" "어디든 가는 곳에 진리가"

 

화순 사내 이영문과 고인돌

전남 화순 땅 도곡면에서 춘양면으로 가는 고갯길 이름은 보검재다. 길이는 5km 정도다. 보검재에는 바위가 많았다. 태곳적 무등산 폭발로 생긴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이다. 효산리 쪽 입구 언덕에도 큼직한 바위가 있었다. 높이 3m에 폭은 3.6m, 길이는 5.3m나 됐다. 괴바우라고도 했고 누구는 괸바위라고도 했다.

 

1995 12 15일 오전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이영문이 제자들과 함께 효산리 입구에 당도했을 때, 이영문은 "범상치 않았다"고 했다.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깎여 있는 바위는 작은 굄돌(지석,支石)들 위에 놓여 있었다. 시작이었다.

 

이영문은 수풀을 헤치고 보검재 속으로 들어가 길섶을 샅샅이 훑었다. 마흔두 살짜리 젊은 교수가 가시 비죽한 잡목을 헤치고 언덕을 기어올라 바위 밑동을 보면, 또 어김없이 굄돌이 놓여 있었다. 훗날 발굴 조사가 끝나면서 모두 세어보니 5km 고갯길 양쪽에 고인돌이 모두 596개나 됐다.

 

채석장으로 쓰였던 감태바위(감투바위)에서는 조선시대 돈치기 놀이를 했던 상평통보가 나왔고 청자 부스러기도 나왔다. 200t에 이르는 핑매바위에는 1929년 새겨놓은 여흥 민씨 세장산(世葬山) 비석이 보인다. 무덤, 제단으로 쓰인 고인돌은 물론 채석장까지 갖춘 청동기 흔적에 세월을 초월한 각 시대 손길이 남아 있다. 2002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감투바위 혹은 감태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무리는 청동기 시대 채석장이었다. 이곳에서 캐낸 돌로 그 옛날 화순사람들은 고인돌을 만들었다. 화순 보검재 고개에는 1995년 젊은 학자 이영문이 발견한 고인돌 596개가 서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화순

 

이영문은 고향 화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정주하는 사내다. 김병연(18071863)은 달랐다. 평생을 떠돈 유목민이었다. 세간에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은 고향이 경기도 양주였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집안이 멸족돼 강원도 영월 땅에 숨어 살았다. 살다가 영월 백일장에 '김익순의 죄를 논함'을 글제로 일등을 했는데 알고 보니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였다. 역적 가문이요 조상을 능멸한 죄책감에 김병연은 팔도를 방랑했다. 세상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다.


-김삿갓 초장지(初葬地)

 

김병연은 1841년과 1850, 1857년 이렇게 세 번 화순을 찾았다. 마지막 6년 살던 동복면 구암마을에 둘째 아들 익균이 찾아왔지만 막무가내였다. 1863년 김병연이 구암마을 선비 정치업의 사랑채에서 죽었다. 정치업은 김병연 시신을 거둬 마을 뒷산 무연고 묘지에 초장(初葬)을 치러줬다. 묘지는 동산(洞山) 혹은 천한 놈들 묻었다고 똥묏등이라고 불렀다. 3년 뒤 익균이 찾아와 아비 시신을 거둬 영월에 묻었다. 화순 구암마을에는 초장지 표석과 김병연이 죽은 정씨 사랑채가 복원돼 있다.

 

관광객을 부르는 적벽과 운주사

화순 사내 이영문은 화순으로 돌아와 고인돌을 찾아냈고 정처없던 김삿갓은 화순에서 죽었다. 말년에 구암마을에서 보낸 6년 세월은 가장 긴 정주 생활이었다. 20세기 학자는 화순에 집착하며, 19세기 시인은 어이하여 아들을 뿌리치고 화순에서 눈을 감았을까.


-화순적벽

 

동복면 동복호반에는 적벽(赤壁)이 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된 신재 최산두가 중국 장강에 있는 적벽을 빗대서 지은 이름이다. 물 위로 80m 솟은 수직절벽이 사시사철 아름답다. 지금은 동복댐으로 수위가 올라 절벽 높이가 30m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최산두도, 정약용도, 김병연도 적벽이 곱고 웅장하다고 다들 한마디씩 노래했다. 오랫동안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이 적벽이 2014년 가을 개방됐다. 난리가 터졌다. 팔도 사람들이 굳이 화순 땅으로 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운주사 와불. 최근 운주사가 원래 도교 사원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다른 이유는 운주사다. 경내 곳곳에 석불이 서 있고 바위에 기대어 있고 땅바닥에 뒹군다. 탑마다 있는 기하학적 문양과 원형 탑, 북두칠성 배치를 닮은 산기슭 칠성바위 그리고 민짜 석불…. 최근에는 이 절이 불교가 아니라 도교사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불상들 손 모양이 부처상이 가진 수인(手印)과 전혀 다르고 탑 배치와 문양이 천문학적이라는 근거를 든다. 김삿갓이 운주사에 들렀을까? 그 천재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려고? 그럴 리가 없다.

 

떠나온 주잠과 떠나간 정율성

그렇게 화순 땅에 세월이 흐른다. 1224년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서던 무렵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 학자 주희의 증손자 주잠(朱潛·11941260)이 망명을 감행했다. 일곱 학자와 경호원과 가족을 데리고 황해 건너 도착한 곳이 능주, 지금 화순이었다. 주잠은 신안 주씨 시조다. 주잠은 원나라 첩자들을 피해 이름을 덕적으로 바꾸고 무등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외동딸과 경호 무사 구존유가 결혼을 했다. 지금도 신안 주씨와 능성 구씨는 쉽사리 통혼을 하지 않는다. 만대창성을 기리며 본관도 바꾸고 전국으로 흩어져 살던 신안 주씨는 조선조 고종 때 본관을 통일하고 지금 13만 명이 넘는 대가문이 되었다.


-주잠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시대가 되었다. 화순 땅에 주희를 기리는 주자묘(朱子廟)가 웅장하게 섰다. 2014년 서울대를 찾은 중국 주석 시진핑은 "주잠은 원나라가 해외 파견한 교수"라고 했다. 주자묘를 지키는 주잠 26세손 주형식은 피식 웃는다.

주자묘에서 지석천을 건너면 108년 전 개교한 능주초등학교가 나온다. 정율성(1914~1976)은 이 학교가 있는 능주면 관영리 사람이다. 정율성은 세 살 무렵인 1917년부터 6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이 학교를 다녔다. 기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앞 신청(
神廳)에서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933년 중국으로 가서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의열단의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국 팔로군 행진곡을 비롯해 숱한 항일투쟁가를 지었다. 팔로군행진곡은 지금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다. 정율성은 중국 3대 혁명음악가로 추앙받는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이름 꺼내기도 금기였던 사내. 그를 기리는 정율성 교실이 이 학교에 재현돼 있다. 옛 교문 입구에는 그 동상이 서 있다. 누구는 망명지로 화순을 택했고 누구는 혁명을 위해 화순을 떠났다. 떠난 자도 택한 자도 지금 모두 화순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 정찬주가 던진 화두


-화순에 사는 소설가 정찬주.

 

그 모든 인연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에 정찬주에게 물었다. "왜 그리 다들 화순에 머물고 화순에서 죽고 화순을 찾는 건가요?" 정찬주는 소설가다. 2001년 잡지 샘터사 기자를 끝으로 도시를 떠났다. 보성이 고향인데, 고개 너머 나오는 화순 땅 쌍봉사 앞에 집을 짓고 산다. 15년째다.

 

'귀 씻어서 성불하겠다'며 집 이름은 이불재(耳佛齋)라 지었다. 사랑채는 생전에 법정 스님이 '무염산방(無染山房)'이라 지어줬다.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말했다. "때로는 가두고 때로는 풀어주려면 일단 스스로 가두려고 화순으로 내려왔다. 만족한다." 도시를 향하던 그리움은 완전히 정리됐고, 이제 도시에 가면 이틀을 머물지 못한다. 대신 사람들이 찾아온다. 정찬주 글을 보고 작가를 찾아온 사람, 책 들고 처마 밑에 비를 긋고 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책을 쓴 작가 집이라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 별 사람 다 있다.

그가 말했다. "왜 화순이냐고? 사람들이 명당 명당 하는데, 명당이 따로 있나? 잘살면 명당이라 부르는 게지. 명당은 터 덕(
)이 아니라 인덕(人德)이오 인덕." 그래도 또 물었다. 왜 고개 너머 고향이 아니고 화순이냐고. 그가 답했다. "임제선사가 말했다.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고.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 어딜 가든 주인이 되어 살면 그곳이 진리거늘." 이 찌는 염천(炎天) 1 2일 꼬박 화순 땅을 헤맨 나에게 여긴들 어떠하고 저긴들 어떠하냐라니. 이불재 맞은편 쌍봉사 앞마당에 앉으니 돌좌탁에 이따만 한 공룡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발톱자국까지 선명한 발자국에 나는 고인돌을 발견한 이영문과 화순에서 죽은 시인과 화순에 은둔한 작가를 망각해버렸다.

 

[화순 여행수첩]


 

〈볼거리〉

1.
적벽: 매주 수, 토 개방. 예약 필수. 1만원. tour.hwasun.go.kr

 

2.김삿갓 종명지와 공원: 동복면 구암마을. 종명지터 위편 마을 뒤쪽에 초장지가 있다.

 

3.능주초등학교 정율성 교실: 학교 후문 쪽 동상과 역사관에 있는 정율성 교실.

 

4.주자묘: 능주초등학교에서 지석천 건너. 아직 공사 중이라 조금 어수선. 근처에 있는 영벽정도 꼭 가볼 것.

 

5.운주사와 고인돌 공원, 쌍봉사: 화순 남쪽. 쌍봉사는 목탑형식 대웅전과 뒤편 철감선사 부도탑을 꼭 볼 것.

〈맛집〉

1.
영벽정식당: 메기탕. 3만원, 4만원. 능주면 관영리 165-8, (061)372-1 210 2.사계절: 전복한방약닭. 6만원. 도곡온천 부근. 도곡면 천암리 117-4, (061)373-4477 3.달맞이흑두부: 각종 두부요리. 동면 천덕리 480, (061)372-8465

〈숙소〉

도곡온천과 화순온천. 남쪽은 도곡온천, 북쪽은 화순온천에 숙소를 잡을 것.

〈화순 여행정보〉

tour.hwasun.go.kr, 문화관광과 (061)379-3501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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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cgan14/2185   김삿갓

 

http://blog.daum.net/cgan14/253    마대산(馬垈山)(강원영월): 김삿갓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