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은 왜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나]
[그랜드 투어에서 탄생한 '국부론']
아이작 뉴턴은 왜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나
영국 런던 시내의 런던탑에 있는 뉴턴의 초상화. 한때 왕궁이던 이곳은 뉴턴 시절 왕립 조폐국(Royal Mint)이 있었고, 현재 영국 화폐 박물관인 이곳에 이 초상화가 있다.(왼쪽), 존 로크(오른쪽)/민태기 제공, 그래픽=백형선
1696년 윌리엄 첼로너라는 영국 신사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투명하고 공정해야 할 조폐국이 부정과 조작의 온상이라며 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영국 역사상 악명 높은 화폐 위조범이었다. 화폐 제조 과정을 알 길 없던 민초들은 첼로너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고, 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다.
음모론으로 그가 원한 것은 기밀로 둘러싸인 조폐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조폐국 책임자는 아이작 뉴턴이었다. 뉴턴이 조폐국을 맡게 된 사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87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할 무렵 정국은 혼란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학위를 주라는 국왕의 요구에 교수들은 반발했다. 뉴턴은 ‘왕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지만, 위법한 명령일 때는 불복종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며 교수들을 이끌었다. 1688년 의회는 국왕을 축출했고, 역사는 이를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의원이 된 뉴턴은 1689년 권리장전에 이렇게 적었다.
“충성 서약은 오직 법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충성과 복종이 법을 넘어서면 노예임을 선언하는 것이고 왕은 절대적 지배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서약을 했더라도 우리는 법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다.”
이 무렵 뉴턴은 막 귀국한 존 로크를 만났다. ‘사회계약설’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로크는 원래 과학을 공부하던 의사였다. 간 낭종 제거 수술에 성공해 귀족의 목숨도 살린 적이 있을 정도로 꽤 실력이 있었지만, 왕실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망명했다. 이후 명예혁명이 성공하자 영국에 돌아왔다.
이때 그가 마주한 것은 만유인력 법칙의 ‘프린키피아’였다. 인류 문명을 완전히 바꾼 엄청난 대작에 감탄한 그는 런던 정계에 진출한 뉴턴과 친해진다.
당시 새 정부는 화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은화의 테두리를 갉아내 팔아먹는 일이 성행했고, 테두리가 깎인 은화만 시중에 넘쳐났다. 결국 영국 은화 가치는 폭락하고, 대량 은화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시중엔 돈이 돌지 않았다. 뉴턴과 존 로크는 결국 은화 테두리에 톱니를 새긴 새 화폐를 제안했다.
하지만 테두리가 없는 구 화폐가 여전히 쓰여 새 화폐는 퍼지지 못하고, 심지어 이 테두리조차 위조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첼로너가 있었다.
당시 화폐 위조는 반역죄였다. 명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권에 화폐 가치 폭락은 국가 전복 위기로 이어져 존 로크와 지식인들이 발 벗고 나섰다. 위조범들은 더욱 대담해졌고, 수사망이 좁혀질 때마다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심지어 우두머리 첼로너는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 신분을 세탁하고, 정쟁을 이용해 더 대담한 일을 벌였다. 1696년 조폐국을 아예 자신이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폐국에 추천된 인물은 뉴턴이었다. 뉴턴은 유통되는 주화를 모두 회수해 새 디자인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화폐 고갈이 워낙 심각해 서둘러야 했지만, 조폐국 직원들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1696년 5월 조폐국에 출근하기 시작한 뉴턴의 첫마디는 “직접 보고 계산한 것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말라”였다. 공정을 뜯어보고, 장비를 다시 배치하고, 인력을 재조정했다. 대수학자가 직접 달려들자 1만5000파운드도 어렵다던 생산 라인이 매주 10만파운드를 쏟아냈다. 도무지 언제 끝날지 모르던 재주화 작업은 이렇게 정상 궤도에 올랐다.
동시에 뉴턴은 위조범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여럿 잡힌 적이 있지만 그들이 내놓은 변명에 사법기관은 속수무책이었다. 뉴턴은 달랐다. 위장 잠입과 정보원 고용을 마다하지 않고, 100명도 넘게 체포해 직접 취조와 심문을 맡았다.
누구 말도 믿지 않았던 뉴턴은 거짓 증언의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매서운 추궁에 한 사람씩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남은 자들은 혹시 살 수 있을까 싶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턴에게 자비란 없었다. 1697년 19명을 사형시킨 데 이어, 이듬해에도 8명을 더 사형시켰다.
이 과정에서 위조의 정점에 있던 첼로너의 정체가 드러났다. 음모론으로 권력을 차지하려던 첼로너는 궁지에 몰렸다. 사법 제도를 잘 알던 그는 처음에 묵비권을 행사했고, 다른 공범자들에게 혐의를 덮어씌우기도 했으며, 막판에는 관할 법원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상대는 뉴턴이었다. 뉴턴이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논리를 확보했다는 것이고, 첼로너의 반박은 무시됐다. 첼로너는 뒷배였던 귀족들이 자신을 구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뉴턴과 맞섰다간 반역 동조자로 몰릴 판이었다. 법정 공방이 이어졌지만, 뉴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첼로너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서 그는 셔츠를 찢고 울부짖으며 미친 척 행동했고 뉴턴에게 호소문도 보냈지만, 뉴턴은 꿈쩍하지 않았다. 1699년 반역 우두머리 첼로너는 사형당했고, 같은 해 주화 재주조도 마무리됐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다. 늘 선거 때면 과학자가 과학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인류를 달에 보낸 것은 재무 관료 출신 NASA 국장 제임스 웹이었다. 반대로 과학자 뉴턴은 화폐 개혁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다.
어쩌면 권력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과학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과연 그동안 정치에 과학자가 참여하지 않아서 문제였을까. 그보다 역대 정권에서 우리 과학계는 어땠는지,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뛰어든 뉴턴의 모습에서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뉴턴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서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런 진짜 과학자 말이다.
-민태기 '판타레이' 저자·공학박사, 조선일보(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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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에서 탄생한 '국부론'
그랜드 투어에서 만난 의사 케네, 국부론 애덤 스미스
경제를 혈액 순환으로 이해한 케네의 자유방임주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자유시장경제로 발전
과학·기술 경계 넘어선 '루너 소사이어티'가 만든
사상 최초 산학 협동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세상을 뒤바꾼 새로운 것은 늘 경계 밖에서 탄생했다
지난달 실리콘 밸리의 존경을 받았던 크리스텐슨 교수의 타계 소식에 그의 '파괴적 혁신' 이론이 다시 주목받았다. 이는 아마도 우리 사회가 늘 혁신에 목말라하기 때문일 텐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는 혁신이 왜 없나?'라는 자책이 이어졌다. 원인으로는 창의력 부재나 기초 학문 홀대 등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서구 산업화의 초기 역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뒤바꾼 변화의 중심에는 경계를 넘는 여행이 있었고, 출신의 벽을 무너뜨린 모임이 있었다.
1763년 영국 재무장관 타운센드는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애덤 스미스에게 아들의 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부탁한다. 타운센드가 제시한 조건은 여행 경비와 별도로 교수 연봉의 두 배를 평생 연금으로 지급하는 것. 다음 해 시작된 여행에서 이들은 유럽 여러 도시를 다니며 문화를 익히고 볼테르와 같은 당대 사상가들을 만나 생각의 폭을 넓혔다. 이처럼 18세기 영국 지도층에서는 자제들의 견문을 쌓아주고자 최고 지성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한다.
최고 지성들이 소통했던 그랜드 투어
이 무렵 글래스고 대학에는 연구 장비를 위해 고용된 제임스 와트가 있었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당시 글래스고 대학 교수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 신념에 따라 기능공에 불과했던 와트와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었다. 증기기관에 대해서 몰랐던 와트는 교수들이 들여온 뉴커먼 엔진 수리를 맡으며 처음 증기기관을 접하게 된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와트는 이 교수들의 도움으로 뉴커먼 엔진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실현할 수 없었기에 우선 특허로 등록했다.
이처럼 새로운 것은 늘 경계 밖에서 탄생한다. 경제를 물리 현상으로 이해한 것은 의사 케네였고, 이를 자유시장경제로 발전시킨 것은 도덕철학 교수 애덤 스미스였으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그랜드 투어로 소통했다. 경계를 넘어선 혁신은 덜 발전한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산업과 기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세계 7대 수학 난제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은 위상수학 문제였지만, 2002년 러시아의 페렐만은 위상수학에서 벗어나 유체와 열역학을 결합한 물리 방정식으로 증명했다. 골프광이었던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는 골프화에서 발견한 미생물로 2015년 노벨상을 받았다. 벽을 허물고 과감히 경계를 뛰어넘는 개방과 포용, 이것이 혁신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한편 그랜드 투어는 19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행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스탠퍼드는 그랜드 투어를 같이 떠났다가 급사한 아들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대학을 설립한다. 1000만평이나 되는 말 목장에 세운 이 대학이 바로 스탠퍼드 대학이다. 하지만 주변에 변변한 산업이 없어 졸업생들은 일자리를 못 구했고, 누적되는 청년 실업을 타개하기 위해 대학 당국은 교수들에게 창업을 독려한다. 이렇게 하여 휼렛패커드를 시작으로 인텔을 포함한 수십 회사가 스탠퍼드 대학에 들어선다. 이후 노벨상 수상자 쇼클리가 가세하여 산학 연구 단지로 변신한 말 목장은 실리콘 밸리라 부르게 되었고, 애플, 구글, 페이스북을 탄생시키며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민태기 에스엔에이치 연구소장·공학박사, 조선일보(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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