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經濟-家計]

[반도체가 어려우면 자동차가 있다] .... [鄭周永]

뚝섬 2023. 4. 25. 06:31

[반도체가 어려우면 자동차가 있다]

[90m 절벽서 떨어진 커플 살린 한국車] 

[현대차 日시장 재도전] 

[정의선 회장의 도전과 과제]

[정주영] 

 

 

 

반도체가 어려우면 자동차가 있다

 

1980년대 일본 미쓰비시 엔진을 받아쓰던 현대차가 국산 엔진 개발에 나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전투기 ‘제로센’ 엔진을 개발했던 구보 도미오 미쓰비시 회장이 정주영 현대 회장을 찾아왔다.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50% 깎아주겠다”. 매년 영업이익 절반을 로열티로 내던 처지에서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정 회장은 거절했다. ‘엔진 개발 능력을 가져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단이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을 만들었다.

 

전기차 아이오닉5에 기대 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현대차그룹

 

▶현대차가 4기통 휘발유 엔진 개발에 성공하자 구보 회장이 현대차 연구소를 찾아와 “가장 어려웠던 게 뭐냐”고 물었다. 개발팀장은 “엔진 열변형을 잡는 게 어려웠다”면서 엔진에 온도계 200여 개를 꽂아 열변형을 측정한 시제품을 보여주였다. 구보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기술진을 불러 모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10년 내에 현대차에 역전당할 것”이라고 호통쳤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쓰비시는 2005년부터 현대차에 로열티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1986년 엑셀을 앞세워 미국 수출 시장 문을 두드렸다. 고장이 잦아 조롱거리가 됐다. 미국 TV 토크쇼에선 “출발할 때 뒤에서 밀어야 하고, 내리막길에서만 달리는 1인용 썰매가 뭔지 아세요? ‘현대’랍니다”라고 놀렸다. 영국 BBC방송은 현대차 엑센트를 ‘엑시던트(사고)’라고 조롱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10년·10만마일 보증수리’ 승부수를 던졌다. 3년 만에 대미 수출이 3배로 늘어났다.

 

미쓰비시는 망해서 닛산에 인수됐지만, 현대차는 글로벌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지난해 684만대를 생산한 현대차그룹 덕에 한국 자동차 산업은 874억달러(부품 포함)를 수출해 반도체(1292억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올 1분기 중에는 자동차가 반도체를 제치고 수출 1위(171억달러)로 올라섰다. 130억달러 흑자를 내며 반도체 대신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70년 전 미군 지프를 개조한 ‘시발자동차’로 시작한 한국 자동차 산업이 미래차 분야에선 선두 그룹이다. 1회 충전에 524㎞를 달리는 현대 아이오닉5는 ‘2022년 세계 올해의 차’, 3.5초 만에 시속 100㎞를 찍는 기아 EV6는 ‘2022년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전기차 황제 일론 머스크도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현대차는 내연기관개발센터를 배터리개발센터로 대체하며 전기차에 올인하고 있다. 국산 엔진 개발, 10만마일 무상 수리에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사에서 제3의 변곡점으로 기록됐으면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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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m 절벽서 떨어진 커플 살린 한국車

 

심하게 찌그러진 채 뒤집어진 차량에서 사람이 생존하긴 어려워 보였다. 험준한 바위 협곡 밑으로 90m 넘게 굴러 떨어진 차였다. 15초간의 낙하 충격으로 타이어까지 튕겨 나갔다. 그런데 차량 안에 타고 있던 미국인 커플은 뼈 하나 부러진 곳이 없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 사진과 함께 기적과 같은 생존 사실을 알렸다. “현대 엘란트라(국내 모델명 아반떼) N은 훌륭한 차”라면서.

▷이달 중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차량 사고의 생존자 커플은 뒤늦게 진행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백만분의 1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요즘 한국 자동차의 안전성을 따져보면 사실 그 확률을 확 올려서 말해도 무리가 없다. 지난해 2월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가 제네시스 GV80를 타고 가다 벌어진 충돌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올해는 유명 아이스하키 선수 야로미르 야그르가 기아 EV6를 몰다 트램에 부딪혔지만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그는 당시 “기아가 나를 구했다”고 했다.

교통사고 시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내부 안전공간 확보와 충격 완화다. 충격을 받아도 비틀리지 않고 버티는 힘이 좋은 초고장력 강판의 사용 비중이 높을수록 안전성이 커진다. 반대로 충격 흡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아코디언처럼 잘 구부러지게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다. 용접 기술과 접착제, 내부 보강재 성능도 영향을 미친다. 최대 10개에 이르는 에어백 중에는 탑승자들끼리 머리가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중간 히터에서 터지는 것도 있다.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안전성 강화 경쟁은 치열하다. 현대차의 경우 국내에서만 연간 700여 회의 충돌 테스트를 진행한다.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부터 데스밸리 사막의 혹서까지 다양한 환경을 설정해 실험용 차량을 떨어뜨리고 굴리고 처박는다. 사람 모양의 실험용 더미도 나이와 성별 등 특성에 따라 160개가 넘는다. 더미의 몸 곳곳에 부착된 센서도 150개에 이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별도의 시뮬레이션 테스트까지 1만5000회를 거치고, 볼보는 교통사고 데이터를 분석, 누적해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눈부신 기술 발달 덕에 “이제 웬만한 자동차 사고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말도 나온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에서 안전성 최고 등급인 ‘TSP+’를 받는 국산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3000명에 육박한다. 하드웨어 안전장치에만 기대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음주운전 근절, 안전벨트 착용, 상대방을 배려하는 신중한 운전 같은 기본이 지켜져야 한다. 자동차 안전성의 핵심 키도 결국 사람이 쥐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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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日시장 재도전

 

몇 년 전 한 재일(在日) 한국인 사업가가 검은색 제네시스를 몰고 호텔에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처음 보는 엠블럼에 신기한 듯 “무슨 차냐”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현대차라는 답에 흥미를 잃은 듯 이내 흩어졌다. 해외 어느 나라를 가든 마주치는 한국차지만 일본만큼은 여전히 불모지다. 한 번 쓰디쓴 실패를 맛본 현대차가 일본시장에 13년 만에 다시 진출한다고 한다.

▷현대차가 일본 시장에 처음 진출한 때는 2001년이었다. 한일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제1차 한류 붐이 불고, 2002월드컵축구 동시 개최를 앞두고 한일 관계에 훈풍이 불던 때다. 마침 같은 해에 일본 도요타자동차도 한국에 진출했다. 도요타는 고급 세단 렉서스 시리즈를 앞세워 단숨에 한국 수입차 시장을 장악했다. 2004년부터 3년 연속 수입차 시장 1위를 차지했다. 독일차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인 데다 ‘일본차는 잔고장이 없다’는 인식까지 퍼지며 승승장구했다.

▷현대차는 일본시장 진출 첫해 1000여 대를 팔아 한국에 진출한 도요타와 비슷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남는 게 없었다. 쏘나타 그랜저 등 중형 모델을 앞세웠는데 마진은 낮고 마케팅 비용은 한국의 몇 배였다. 한국차를 한 수 아래로 보는 현지 인식도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현대차 판매량은 이듬해 2000대 이상으로 늘었으나 곧 정체됐고 2008년에는 501대로 쪼그라들었다. 결국 2009년 누적 판매량 1만5000대를 끝으로 철수했다. 연구개발 조직을 남겨 훗날을 도모했지만 도요타와 대비되는 씁쓸한 퇴장이었다.

 

자국 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일본은 원래부터 ‘수입차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다1980년대에는 일본차가 미국 시장을 잠식하는데 미국차는 일본 시장에서 죽을 쑤면서 미일 무역분쟁으로 번졌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입차 비중이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한다. 그나마 잘 팔리는 수입차는 독일차인데 한국과 달리 미니와 골프 등 해치백 스타일의 작은 차가 강세다. 도로 폭이 좁고 차고지 증명제로 좁은 집에 주차장을 만들어야 하니 크기를 따질 수밖에 없다.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하는 시장이다.

▷일본 시장에 재진출하는 현대차가 이번에는 전기차 아이오닉5와 넥쏘를 앞세운다고 한다. 승산은 있다.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하이브리드 차량에 ‘올인’하면서 전기차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현대차의 브랜드 파워도 옛날의 현대차가 아니다. 지난해 자동차 본고장 유럽에서 BMW, 다임러, 도요타그룹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판매량 4위에 올랐다. K팝과 K드라마를 앞세운 2차 한류 붐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졌다.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 결실을 볼 때다.


-배극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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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회장의 도전과 과제 

 

밥상머리서 배운 겸손한 리더십, 정의선의 현대차 어떻게 바뀌나

 

정의선(왼쪽) 현대차그룹 신임 회장이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 참석해 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앞에 놓인 비행체 모형은 현대차가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도심 항공기 콘셉트 모델. /현대차그룹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

 

14일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의 취임사에는 평소 강조해 온 경영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이 강조했던 ‘품질 경영’을 이어받는 한편, ‘고객 경영’을 덧붙여 강조해왔다. 지난 2018년 9월 수석 부회장 승진 후 고객 가치를 강조한 책을 직원들에게 선물하며 “어떻게 하면 고객이 우리 차를 사줄까만 고민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날 취임사에서도 “우리 모든 활동은 고객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평소 “단순히 차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인류 행복에 기여하는 존경받는 기업이 되자”고 말했다. 이날 취임사에서 그는 “'자유로운 이동과 평화로운 삶'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고 그 결실을 나누면서 사랑받는 기업이 되자”고 했다.

 

그는 이날 할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뿐 아니라 ‘포니 정’이라 일컫는 작은아버지 정세영 전 현대차 명예회장, 사촌 형인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김철호 기아차 창업 회장을 언급하며 업적을 치하했다. 국산 순수차 ‘포니’ 개발을 주도해 현대차 초창기 기틀을 닦았지만, 1999년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차 경영권을 내줘야 했던 정세영 전 회장과 그의 아들 정몽규 회장까지 챙긴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가족 간 우애를 중시하고 도리가 무엇인지 아는 정의선 회장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해석했다.

 

엄격한 가정 교육 받으며 ‘겸손한 카리스마’ 키워

 

정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겸손하다”고 말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며 “하지만 대기업 최고경영자로서 아랫사람을 다루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서울 청운동 할아버지(정주영 창업주) 자택에서 현대가의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매일 오전 5시 가족과 식사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기본 예절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아버지에게도 엄격한 훈육을 받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는다. 그는 2018년 수석 부회장에 오른 뒤에도 서울 양재동 본사 사옥 1층 정문과 로비를 통해 출근하지 않았다. “1층은 아버지가 다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은 지하 주차장 통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꽃길' 아닌 ‘험지’ 다녀

 

“여기서 나를 걸겠다. 지금 도망치면 어디로 가겠느냐.”

 

사내에선 정의선 회장이 ‘낙하산 오너’가 아니라 ‘진짜 경영인’임을 인정받은 결정적 사건이 전해진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하나뿐인 아들을 ‘꽃길’이 아니라 ‘험지’로 보내 경영 능력을 시험했다. 2005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차 사장으로 보낸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아차는 SUV 시장 위축에다 환율 하락까지 겹쳐 최악 시기를 맞고 있었다. 기아차 실적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자 일부 임원은 당시 정의선 사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오너 3세가 ‘경력 관리’에 실패하면, 나중에 승계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란 우려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당시 임원 회의에서 “나를 걸겠다”고 선언했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 한번 도망가면 다음에 또 그렇게 된다”고도 했다. 그는 이후 피터 슈라이어 아우디 수석 디자이너를 직접 찾아가 영입, 기아차를 ‘디자인 경영’으로 살려냈고, 임원들은 그때부터 그를 다시 보게 됐다.

 

2009년 현대차 부회장을 맡았을 때에도 ‘금융 위기’의 파고를 현명하게 이겨냈다. 미국 시장을 발로 뛰던 정 회장은 ‘구매 후 1년 내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파격 보증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이때 현대차는 해외시장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2010년 최초로 ‘현대·기아차 세계 5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의선 회장 앞에는 또 다른 험로가 예고돼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 자율주행차로 바뀌는 자동차 산업 대전환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 들어갔다. 첨단 전기차로 무장한 테슬라는 기존 완성차 시장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고, GM·폴크스바겐 등은 발 빠른 구조조정에 돌입하며 미래차 투자에 올인하고 있다. 현대차전기차·수소차 병행 전략을 취하며, 모빌리티 서비스 설루션 업체로 변신하기 위한 다각적 투자를 하고 있지만 모두 성공시키기엔 난관이 상당하다. 정 회장은 이날 취임사에서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면서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환경 자율주행차를 개발하고 로보틱스·UAM(도심 항공 모빌리티)·스마트 시티도 빠르게 현실화시키겠다”고 했다.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는 ‘판이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잡아 한 단계씩 도약한 경험이 있다”며 “이번 위기도 정의선 회장의 새로운 리더십을 발판으로 돌파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류정 기자, 조선일보(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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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周永

 

1977년 5월, 정주영은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의 면담 요청을 받고 서울 조선호텔에서 그와 만났다. 스나이더가 입을 열었다.

자동차 독자 개발을 그만둬 주십시오. 포니 개발로 기술력은 증명했다지만, 한국의 조립생산업체 모두를 합쳐도 한 해 고작 30만대 수준인 생산능력으로는 현대자동차의 존속 자체가 위험합니다. 더욱이 지금 국민소득 수준으로는 한국인이 자동차를 사줄 리가 없고요. 정 회장께서는 수출을 염두에 두신 모양인데, 쟁쟁한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신생업체인 현대차가 얼마나 잘 팔릴지 의문입니다. 자, 한 가지 제안하지요. 독자모델 개발을 그만두신다면 포드든 GM이든 크라이슬러든, 현대가 원하는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게끔 여러 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 내수는 물론 아시아 시장 전체가 현대의 몫이 될 것입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현대차를 해외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의연했다. “조만간 한국의 1인당 GNP도 5000달러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또한 몇 년 전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등 도로 여건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기계·전자·화학 등 여타 산업 분야에 미치는 막대한 연관 효과나 고용창출 능력으로 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국은 자동차산업 성공에 꼭 필요한 관련 기술과 소재·숙련공·자본·내수시장 기반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것을 큰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다. “첨단산업을 쫓아가려면 날아가는 비행기에 뛰어올라가 동승해야 가능합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가면 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선진국들은 자기들이 하고 남은 부분만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분야는 남는 것이 없거나 별 볼 일 없는 것들입니다.” 

 

1984 LA 올림픽에 참석해 교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대한올림픽위원장 정주영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도태”

긍정적 사고와 무서운 행동력의 화신인 정주영 앞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들도 굴복하고 문을 열어 준 셈이었다. 정주영은 1977년 제13대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여 1987년까지 10년 동안 회장직을 최장기 연임하며 한국 민간 경제계의 본산인 전경련을 이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전경련의 오랜 숙원이던 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 출연에 스스로 앞장서서, 1977년에 착공하여 1979년에 완공시켰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10월유신, 10·26사건, 신군부 등장,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거세게 불어닥쳤던 거센 풍파를 맨 앞에서 대응해야 했다.

위험을 피하고, 편안하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도태되는 길이다.” 정주영은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마다 자신을 만류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은 단지 건설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살며 도전했던 사업과 그의 행동 특성들을 한데 모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동 건설시장 진출이라는 일대의 모험은 그런 정신이 없이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중동은 지리적으로도 한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종교·인습·언어 면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생소한 지역이다.

석유파동에도 중동진출을 결심한 정주영

 

열사와 사막기후는 그때까지 한국인 어느 누구도 겪어 본 적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거기다가 중동에는 이미 선진국 일류기업들이 기득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중동 주요국의 왕족이나 고위관료 등 지배층과 과거 식민지 관계 때부터의 연고와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고, 사업 기회의 정보도 한 단계 앞서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계나 시공 기술과 자본력, 시공 장비 어느 하나도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장벽은 도리어 정주영의 도전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중동에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몇십 배 오른 석유 값으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이 넘쳐난다. 그들은 몇십 년, 몇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항만·주택·공공시설 등 건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물론 우리 건설업계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두 번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는 외화가 바닥나서 국가 부도 직전에 놓여 있다. 외화를 벌어들일 돌파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석유파동 당시 시내주유소에서 석유를 사려는 시민들이 몰려 석유통을 줄지어 내려 놓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너무 엄청난 위험요소 때문에, 현대그룹 창업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형제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정주영의 중동 진출을 만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동 진출을 강행했다.

정주영은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아랍어로 현대건설 홍보영화를 만들어 중동에 배포토록 했다. 그리고 오일달러가 가장 풍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의 해외건설 수주를 위한 전략팀을 구성했다. 그 결과 바레인 아스리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공사금액 1억3700만달러로, 그때까지 국내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한국은 명실공히 새로운 중동 진출 시대를 열게 된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1975년 착공, 2년여 만인 1977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바레인의 무하라크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매립지에 드라이 도크를 세우는 공사였다. 현대는 이 공사를 위해 토목공사 33만명, 건축공사 26만명, 전기공사 25만명 등 연 90만여명을 투입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1억3700만달러 아스리 공사 수주

아스리조선소 공사에 이어 현대는 두 번째로 대형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기지 확장공사로, 동부 주베일 지역의 기존 군항을 확장하는 사업이었다. 이 공사는 지금까지도 ‘신(神)의 공사’ ‘20세기 최대 대역사’로 불리고 있다. 현대는 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걸었으나, 구미 선진국들이 독점하고 있는 사우디 건설시장에서 현대가 입찰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영국·독일 등 세계 9개 국가에서 경쟁을 벌인 이 공사에서 정주영은 승리를 위한 ‘히든 카드’를 제시한다. 100% 토종기술’로 건립한 울산 현대조선소의 기술 노하우를 사우디 정부 측에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 현대는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공사금액은 무려 9억3000만달러. 이 금액은 국가예산 30%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공사 수주가 발표되자 국민은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이며 기뻐했다. 그러나 막상 시공권은 따냈지만 공사가 문제였다. 5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주베일항 공사는 신도 시도하기 어려운 공사로 평가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모든 기자재를 울산에서 제작, 사우디까지 운반토록 했다. 외화유출을 한 푼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였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000㎞, 경부고속도로를 무려 15번 왕복하는 거리다. 재킷 철 구조물 하나만도 무게 550t으로, 10층 빌딩 크기였다

 

서산 간척산업의 신화

 

정주영은 세계 최대 태풍권역인 필리핀 바다를 지나 동남아 해상,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끌고 가는 금세기 최대 대양 수송작전을 감행했다.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리며 중량 550t짜리 재킷을 한계오차 5㎝ 이내로 꼭 20㎞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신의 공사’였다. 공사를 완벽하게 끝내자 세계는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보냈다. 이로써 ‘현대’의 명성은 누구라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확고한 것이 되었다.

정주영의 해외무대는 중동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영하 50도의 알래스카 맥켄리산 기슭에까지, 사업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정주영은 이렇게 강조했다. “현장을 한눈에 꿰뚫고 있어야 문제가 생겼을 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현장을 모르는 최고경영자의 말을 현장 사람들은 존중하지 않는다.”

정주영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놀라고, 뛰어난 창의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고 한다. 정주영의 아이디어가 최고로 빛을 발한 것이 서산 간척사업에서 보여준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남이 하는 일과 다르게 해야 남과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을 앞설 수 있다.” 정주영 일생의 행적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행동 특징이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저히 신봉했고 또 이를 실천했다. 건설·조선·자동차·철강 등 천하의 대기업가인 정주영은 뜻밖에도 늘 “농사짓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평생을 성실하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정주영은 서산만 개발이라는 대공사를 앞두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흡족해 하시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으며 서산 공사현장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서산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부터 계획했지만 넓은 간척 면적에다 유난히 간만의 차가 심하여 토목기술상으로 대단히 험난한 공사였으며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일이다. 정주영은 이 대사업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1982년 B지구, 1983년 A지구 방조제 연결공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A지구였다. 9.8㎞나 되는 물막이 제방공사는 양쪽으로부터 둑을 쌓아감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의 간격이 약 270m 정도 남았을 때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유속이 초속 8m가 넘는 밀물 때 엄청난 압력을 가진 물살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자동차만 한 바위도 들어가는 순간 쓸려 내려갈 정도로 무서운 속도의 급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 만든 20t 가까이 되는 바윗덩이도 순식간에 나무토막처럼 물살에 쓸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쌓은 둑도 점점 물살에 쓸려 나가기 시작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토목공학 지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년 경력의 일류 토목기사들도 속수무책 갈팡질팡했다.

고철 유조선을 물막이용으로 끌어오다

그때 정주영의 상상력이 번뜩였다. 그는 해체하여 고철로 만들려고 수입해 울산 앞바다에 대어 놓은, 길이가 332m나 되는 22만6000t급 대형 유조선을 생각해 냈다. 그는 그것을 끌어다가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에 대고 유조선에 바닷물을 가득 채워 가라앉혔다. 제아무리 센 물살도 그 육중한 배를 밀어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 사이 무난히 둑을 연결하여 물막이 제방을 완성했다. 그런 다음 유조선의 바닷물을 퍼내 배를 띄워 다시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공사비를 290억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여의도의 약 33배에 달하는 1억5537만㎡(4700만평)의 국토를 새로 만들어서 나라의 지도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이 놀라운 ‘정주영 공법’은 ‘뉴스위크’와 ‘타임’ 등 세계 유명 언론에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되었으며, 영국 런던 템스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회사에서는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서산간척지는 제염작업을 거쳐 1987년 처음으로 벼를 심었고, 지금은 연간 50만섬 이상의 식량을 얻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1970년대 끝 무렵, 한·미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난을 퍼부었고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군사·정치·경제·외교 문제 어느 하나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주한미군 철수를 1981년으로 미루는 것만 결정되었다. 불안정한 한·미관계 향방에 따라 한국 경제도 크게 요동칠 것이 틀림없었다. 1979년 7월 전경련 모임에서 정주영은 신임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의 특별강연회를 열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해 8월 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예상 인원보다 훨씬 많은 300여명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첫마디부터 한국의 안보 상황, 특히 한국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아주 격앙된 어조로 불만을 쏟아놓았다. 남북한이 팽팽한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에 정치·외교적 영향력이 필요할 때마다, 미 7함대와 주한미군 공군력이 한국의 군사력과 합해져야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미 1971년 미 7사단 철수,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태도 등을 겪어 온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하면 미덥지 않은 미국의 손에 좌우되는 일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한국을 구할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물론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전경련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경제 관련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한국 정치 상황과 자주국방 노력, 즉 핵개발에 대한 강력 반대 ‘경고’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오늘 내 이야기가 한국 정부와 언론에 새어 나간다면 나는 곧 미국에 소환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듣는 입장에서는 ‘최후통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리 강연 형식이라 해도 그가 한 말들이 한국 정부와 언론에 전해지지 않을 리 없으며, 노련한 외교관인 그가 그 사실을 예상하지 못할 리 없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의 강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술렁거리던 청중은 흥분하여 앞다투어 항의성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 강연을 추진했던 정주영과 전경련 회장단은 당황하여 서둘러 강연회를 마쳤다. 10월 6일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한 말대로 미국으로 강제 소환되었다. 국제외교 관례상 대사 소환은 극단의 조치에 속한다. 이는 1958년 이승만 정권의 보안법 파동 이후 21년 만에 이루어진, 자주국방으로 핵개발을 강력히 추진하는 박정희 한국 정부에 대한 엄중한 항의 표시였다.

그로부터 20일 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다. 10·26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12·12사태와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뼈아픈 격동의 암울하고 긴 터널로 들어선다. 거의 완성단계였던 박정희 핵개발은 꺾이고, 그 자료들은 모두 미국으로 넘겨졌다고 한다. 그날 강철의 사나이 정주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깊게 탄식했다. 한국 역사에 박정희만 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역사적인 발표가 있었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서울을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는 축제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민족의 숙원사업을 정주영이 앞장서서 이뤄내는 순간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빈곤, 정쟁과 사회혼란, 쿠데타, 부정부패 그리고 지구상 동서냉전의 마지막 군사 긴장 대치지역 등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새겨진 한국의 얼룩진 이미지를 40여 년 만에 떨쳐버리고 한국의 저력을, 한국의 활력을 처음으로 세계만방에 드러내 보인 역사적인 세계 축제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평화·화합·우의를 다지는 세계인의 잔치다. 그것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과 기반시설, 대규모 국제대회 경험, 동서양 진영으로부터 고루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제적인 외교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올림픽을 테러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치를 수 있는 정치 사회 안정이 최우선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남한에 비해 열세에 빠질 것을 우려한 북한이 방해공작에 나섰다. 북한은 “남북이 군사 대치를 하고 있는 휴전선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7년 뒤에 개최될 올림픽 개최지를 서울로 정하는 것은 올림픽을 죽이는 길이 될 것”이라며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올림픽 위원들에게 반대 설득에 열을 올리고 다녔다. 그들 뒤엔 그들 편을 들어 줄 소련과 중국, 그리고 비동맹권 국가들이 있었다.

그만큼 88올림픽 서울 유치 성공은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이 기적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요하게 집행한 주역은 바로 정주영이었다. 당시 정주영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이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일 때, 정주영은 한국 IOC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를 하나씩 각국 IOC 위원 방에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현대그룹의 해외 파견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꽃바구니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 날 각국 IOC 위원들은 꽃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인사가 없었다. 결국 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택한 한국의 정주영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은 역경을 기회로 만들고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해서 많은 대업을 성취한 정주영의 극적인 면모를 또 한 번 세계에 드러낸 것이다.

 

-고정일 소설가, 주간조선(1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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