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經濟-家計]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 [글래스고]

뚝섬 2023. 6. 27. 08:00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기심보다 사회적 공감을 더 중시했다] 

[글래스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기심보다 사회적 공감을 더 중시했다

 

[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경제학 아버지탄생 300주년
애덤 스미스 연구 김광수 교수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애덤 스미스(1723~1790)가 태어난 지 올해로 300년 됐다. 고향인 영국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스미스를 기념하는 세미나와 심포지엄이 잇따른다. 그중 하나가 26일 서울대 분배정의연구센터와 금융연구원 주최로 열린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현대적 재조명’ 심포지엄이다. 심포지엄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는 30년 넘게 애덤 스미스만 외길로 파고든 학자다. 김 교수는 스미스 모교인 글래스고대에서 애덤 스미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20년엔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았다. 지난 19일 김 교수를 만나 애덤 스미스의 진짜 모습과 한국 경제에 주는 함의에 대해 들어 봤다.

 

애덤 스미스를 30년 넘게 연구해 온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를 지난 19일 성균관대 다산경제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애덤 스미스는 ‘전쟁의 경제학(중상주의)’을 ‘자유와 평화의 경제학’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독창적인 것인가.

 

“’보이지 않는 은 스미스가 가장 먼저 썼지만, 18세기 계몽사상가들도 이와 비슷한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invisible chain)’란 말을 종종 썼다. 예컨대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의 정치 풍자 소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나 영국 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등에 나온다. 스미스도 “과학이란 상상력을 동원해서 일관성 없게 보이는 보이는 현상 등을 함께 묶을 있는 일련의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 찾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 스미스에게 ‘보이지 않는 손’이란 무엇인가.

 

스미스의 모든 저술에서보이지 않는 등장한다. ‘철학논집’의 언급에선 보이지 않는 여러 원인의 연결 고리를 뜻한다. 스미스는 인간 세상의 근본 원리인 ‘제1 원리(first principle)’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손’이란 것이다. 마치 뉴턴 물리학의 ‘중력’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스미스는 사회과학의 뉴턴이 되고 싶어 하기도 했다. 시민 가치를 다룬 ‘도덕감정론’에선 동감(공감)의 원리, 그리고 가격을 다룬 ‘국부론’에선 이기심이나 생활 개선 본능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봤다.”

 

/위키피디아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 우리가 통상 아는 ‘보이지 않는 손’ 개념과 다른 것 같다.

 

“보통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면, 이기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둬도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자본주의가 잘 운용된다는 뜻으로 스미스가 얘기했다고 하는데 그런 건 아니다. 스미스의 ‘국부론’과 더불어 중요한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보면, 인간이 이기심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맞지만 동시에 본래동감 따른 사회적 동물의 속성이 있어서 자발적 질서가 형성된다고 한다. 동감에 근거한 정의감과 법과 제도 개선 있을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활동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얘기다.”

 

- 스미스는 스스로 경제학자라고 생각했나.

 

“에든버러에 있는 스미스 묘비에는 “‘도덕감정론’과 ‘국부의 성격과 원인에 관한 탐구(국부론의 원래 이름)’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고 쓰여 있다. 지금은 ‘국부론’ 덕분에 경제학의 아버지로 칭송받지만, 18세기 당시엔 ‘도덕감정론’의 저자로서 스코틀랜드의 도덕철학자이자 계몽주의자로도 인식됐다. 실제 스미스는 1751년 모교인 글래스고대 논리학 교수로 처음 임용받았고, 1년 후 도덕철학 교수가 됐다. 당시 유럽의 도덕철학은 윤리학, 법학, 경제학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지금의 사회과학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융합 교육의 탁월한 모델이었던 셈이다.”

 

애덤 스미스를 30년 넘게 연구해 온 김광수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 19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쌓여 있는 애덤 스미스 관련 책들을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20세기 중반 이후 애덤 스미스 사상을 논하는 중요 책자가 100여 권인데, 그중 60~70%를 갖고 있다”며 “서구에선 근래에 애덤 스미스 연구에 대해서 경제학보다는 정치학, 역사학, 법학, 수사학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 ‘국부론’은 당대에 주목받았나.

 

“1776년 3월 나온 국부론 책값은 2파운드 2실링이었다. 당시 런던 노동자 월급이 2파운드였으니, 비싼 책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부유한 상인과 자본가, 정계 인사들에게 ‘베스트셀러’였다. 스미스는 인세로 1776년 말 300파운드나 받았다고 한다. 또 곧 프랑스어, 독일어, 덴마크어 등 여섯 언어로 번역됐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국부론내용에는 냉담했다고 한다. 국가 개입주의적인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 기조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상업이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이론이 영국 사회에 퍼지려면 다음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 중상주의는 어떤 얘기를 했길래.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한 경제 사조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금, 은 축적을 지향한 중상주의였다. 이에 따르면 노동력은 값싸야 해서 다수 노동자가 가난하고 무지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 국가는 경제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보호무역을 시행해야 한다. 군사력을 동원하고 전쟁을 해서라도 식민지 시장을 확보하고 싼 원료를 사들여 비싼 완성품을 수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해외에서 금, 은을 확보하는 게 국가의 부를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은의 매장량엔 한계가 있다. 결국제로섬 게임이고, 평화보다는 무력 대결로 귀결됐다. 신흥국과 기존 강대국 간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부를 게 자명했다. ‘전쟁의 경제학’이라 부를 수 있다.”

 

미상의 작가가 그린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 스미스는 중상주의와 어떻게 다른 얘기를 했나.

 

스미스 이론의 핵심은 국부(國富) , 은과 같은 화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재화가 풍부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나라에 재화가 풍부해지려면,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들기보다 그들의 경제 후생을 최대로 늘려주기를 정치의 목표로 삼는 타당해진다. 그래야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선 정의가 유지되고 타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시장의 자유 경쟁과 교환은 상호 이익을 증진한다. 이런 조건에서 사적 이익 추구는 자유경쟁을 강화시켜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 복지 수준을 최대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중상주의의전쟁의 경제학자유와 평화의 경제학으로 바꾼 이라고 있다. 스미스는 또 제조업과 상업에서도 경제 잉여가 생긴다고 주장해서 상인과 자본가 사이에서 히트 쳤다.”

 

- 스미스 당시엔 자유경쟁 이론이 참신했지만, 2 대전 불황 극복엔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케인스주의 풍미하지 않았나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실제 유효했다. 노동자 실질 임금과 인구가 늘고 산업 구조의 고도화와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민도(民度)도 높아졌고 민주주의의 진전 등 장기적인 사회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 한계를 드러낸 게 20세기 초 대공황이었다. 그 후 경제 활동을 그저 시장에 맡기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결국 위기를 불러온다고 보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다시 사용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스미스를 보완하기 위해 케인스주의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 애덤 스미스가 현재 한국 경제에 주는 함의는

 

“스미스의 자유시장주의엔 전제 조건이 있다. 국가 차원에서 정의의 체계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공감과 신뢰도 필요하다. 정의에 대한 신뢰가 없고 서로 불신하게 되면, 저 사람 진의가 뭐냐, 저 사람 능력이 뭐냐, 저 사람 하는 일이 뭐냐 따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거래 비용이 엄청나게 늘게 되고 자본주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기심이 제대로 발동하게 하려면 사람들이 공감하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편협한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절충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윤 추구에 매진하는 기업도 질서뿐 아니라 인권을 존중하고 사회적 신뢰를 쌓아야만 잘나갈 있다. 이 토대 없이는 손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잘 알야야 한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올드타운에 위치한 애덤 스미스 동상. /최아리 특파원

 

- 애덤 스미스 연구에 빠져든 계기는.

 

“1980년대 대학원생 시절 세계 학계는 스미스 연구의 르네상스기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국내엔 심화 연구가 거의 없었다. 1980년대 말 스미스 모교인 글래스고대에 유학을 간 이유다. 당시 글래스고대엔 해외 방문 교수가 많았다. 그때 토론 모임에서 일본 교수가 일본에선 약 200여 명이 스미스를 연구한다고 했다. 그 교수가 한국에서는 스미스에 관한 전문 연구자가 몇 명인지 물어 인접국 시민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비인기 소외 분야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명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각오가 외길 인생의 동력이 된 것 같다.”

 

- 최근 애덤 스미스 연구 동향은?

 

“한국에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박순성 동국대 교수 등이 스미스에 관한 논문과 저술을 다수 발간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제 경제사상사 연구자가 대부분 퇴임했고 후학도 거의 없어서 그 공백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 같다. 반면 유럽에선 관련 학회가 활성화돼 있다. 점점 더 저술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 같다. 서구에선 근래에 애덤 스미스와 관련해 경제학보다는 정치학, 역사학, 법학, 수사학 같은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방현철 경제부 차장·경제학 박사, 조선일보(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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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

 

석탄 증기기관 발상지가 '탄소 중립' 선언 성지로

 

①작업 중인 제임스 와트를 그린 그림. 그는 글래스고대학교 안에서 고장 난 기계를 고쳐주는 일을 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열효율 높은 증기기관(왼쪽 작은 사진)을 만들어 산업 전반에 영향을 끼쳤어요. ②‘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최근 전 세계 사람들 눈과 귀가 쏠린 도시가 있었어요. 바로 영국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Glasgow)예요. 글래스고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려 196국 대표단과 각국 정상, 시민단체, 언론인 등 3만여 명이 모였거든요. 회의장 밖에는 10만여 명 시위대가 모여 각국에 기후변화를 위한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했죠.

글래스고는 18세기 이후 철강·화학·섬유·조선 산업이 크게 발달하며 산업혁명을 이끈 도시였어요. 1960년대 중반 이후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침체기를 겪다가, 1980년대 금융·관광 등을 내세운 도시로 탈바꿈했지요. 최근에는 도시 재생 등을 거치며 문화 도시로 알려지고 있답니다. 글래스고는 세계 역사를 바꾼 유명인을 여럿 배출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산업혁명 이끈 제임스 와트

 

글래스고 중심에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재위 1760~1820) 이름을 딴 '조지 광장'이 있어요. 이곳엔 공학자 제임스 와트(1736~1819) 동상이 있답니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이끈 와트는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에요. 그는 고향이 글래스고 서쪽 그리녹이지만, 글래스고에서 꿈을 펼쳤어요.

와트는 어렸을 때부터 선박 기술자이자 상인이었던 아버지 작업장에서 각종 도구 등을 다루며 공학·수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했지만, 호기심은 왕성했어요. 물이 끓는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에 숟가락을 대고 떨어지는 물방울 수를 셌다는 일화도 전해져요.

그는 기계 제작 실력을 키우러 런던에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당시 상공업 중심지였던 글래스고에 자리 잡았어요. 그리고 1757년부터 글래스고대학 안에 가게를 차렸어요. 당시 영국에선 길드(상인들의 조합)에서 정식 도제 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취직하거나 가게를 차릴 수 없었는데, 대학 안에선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서 와트는 교수와 학생들이 맡기는 고장 난 기계나 도구를 수리하고 새 기계도 만들었어요. 이산화탄소를 발견한 화학자 조셉 블랙(1728~1799) 등 많은 과학자와도 교류했고요.

그는 곧 증기기관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증기기관은 증기의 압력으로 실린더 속의 피스톤을 움직여 동력을 얻는 기관이에요. 사실 와트를 증기기관의 발명자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론 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게 아니라 토머스 뉴커먼(1663~1729)이 발명한 증기기관을 개량해 널리 쓰일 수 있게 한 거예요.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열효율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게 문제였어요. 와트는 이를 개량해 석탄을 4분의 1만 들여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증기기관을 만들었고 1769년 특허를 냈어요.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은 광업, 제철 산업, 섬유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줬어요. 공장의 효율을 높여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됐고,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도 이어지며 산업혁명을 이끌었습니다. 과거 석탄으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의 중심 도시였던 글래스고에서 250년이 지나 환경 회의가 열리고 여러 나라가 '탄소 중립'을 선언했으니, 그사이 글로벌 환경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

글래스고대학은 1451년 교황 칙서로 설립됐는데 영어권에서 옥스퍼드·케임브리지·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 이어 넷째로 오래된 대학이에요. 화학자 윌리엄 램지 등 노벨상 수상자 7명, 영국 총리 2명을 배출했답니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1933년 이 대학에서 직접 강의했고 후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글래스고대가 배출한 인물 중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1723~1790)를 빼놓을 수 없어요. 그는 14세에 글래스고대에 입학해 도덕철학을 공부하다 옥스퍼드대학으로 옮겨 공부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1751년부터 글래스고대학의 교수가 되어 논리학과 도덕철학을 가르쳤어요. 그는 훗날 글래스고대 교수 재직 시절을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였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는 1763년 교수 일을 그만두고 유럽을 여행하며 철학자 볼테르, 벤저민 프랭클린 등 당대 지식인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0년간 집필한 끝에 1776년 '국부론'을 출간했죠. 여기서 그는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을 통제하지 말고 자유롭게 놔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개인이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사회가 이롭게 발전한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이끄는 대로 말이에요. 그는 또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으로 '노동 분업'을 제시했어요. 핀 생산 공정을 예로 들었는데, 노동자 1명이 하루에 핀을 20개 만드는데, 공정을 18단계로 나눠 10명이 분업하면 하루에 4만8000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당시 경제학은 학문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는데, 스미스의 국부론은 최초로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한 경제학 저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787년 글래스고대에서 학자의 최고위직인 렉터(대학 명예 총장)에 임명됐어요.

[브레이브 하트 주인공 '윌리엄 월리스']

글래스고에는 6세기쯤 주교 성 뭉고(Saint Mungo)가 교회를 지으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교회가 13세기 글래스고 대성당으로 발전했어요. 대성당 인근엔 지역 유명 인사들이 묻힌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가 있어요. 이곳엔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이 연기한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 기념비도 있죠. 그는 1297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압제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 인물로 지금도 스코틀랜드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에요. 그의 생애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초상화 한 장도 없죠. 영화 '브레이브 하트'도 15세기 소설을 기반으로 했대요. 역사가들은 그가 1270년쯤 글래스고 인근 엘더슬리(Elderslie)에서 태어났고, 글래스고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1305년 런던에서 처형된 것으로 봐요.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교사/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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