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부터 힘든 한국]
[미래를 도둑질한 죄]
[‘벼락거지’ 되는 것 말고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
[‘변창흠표 부동산’은 끝났다]
청혼부터 힘든 한국
한 분이 얼마 전 서울 고급 호텔에 갔는데 옷을 격식 있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너무 많아 놀랐다고 한다. 의아해서 알아보니 프러포즈(청혼)하는 청년들이었다. 이 식당이 청혼 ‘명소’라고 했다. 청혼 명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호텔 프러포즈가 유행하자 호텔들도 경쟁적으로 관련 상품을 내놓는다. 수백만원 하는 곳도 찾는 이가 많다. 서울의 인기 5성급 호텔엔 몇 년 전만 해도 월 2~3건이던 예약이 요즘엔 20~30건씩 밀려든다. 상당수가 청혼이라고 한다. 제대로 청혼도 없이 결혼해서 사는 중년 이상들에게는 유별나다고 느껴지는 풍경이다.
▶인스타그램에 ‘호텔 프러포즈’ 해시태그(#)를 치면 사진 수만 장이 뜬다. 남녀가 꽃과 촛불 장식, ‘나와 결혼해 줘’라고 쓴 풍선, 하트가 새겨진 케이크 앞에서 미소 짓는다. 소셜미디어 과시 문화가 이를 부채질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 남성은 “여자친구가 소셜미디어에 올릴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해 무리해서 호텔 패키지를 샀다”고 한다.
▶아직 일부의 얘기이겠지만 외신까지 이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싼 프러포즈가 그러지 않아도 결혼을 망설이는 한국 남성들을 더욱 위축시킨다”고 했다. 호텔에서 프러포즈 하느라 하룻밤에 4500달러(약 570만원)를 쓴 남성의 하소연도 소개했다. 호텔 프러포즈 때 주는 선물 부담도 크다고 한다. 여성이 “내 친구가 프러포즈 선물로 받은 명품”이라며 소셜미디어에 뜬 사진을 보여주면 남성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프러포즈에 대한 견해는 남녀가 갈린다. 한 여론조사 업체가 조사했더니 ‘호텔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는 여성 응답은 40%를 넘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남성 33%는 ‘돈 부담 때문에 프러포즈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 자금 부담도 큰데 수백만원 들여 프러포즈까지 해야 하느냐는 항변이다. 호텔 프러포즈를 원하는 여성을 탓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부동산 폭등 이후 번듯한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없게 됐다. 프러포즈 호사는 그에 대한 보상 심리라는 것이다. ‘월급 아껴 집은 못 사도 호텔 프러포즈는 할 수 있다’는 광고 카피가 그런 심리를 파고든다.
▶미국 체조 스타 시몬 바일스가 지난해 초 프러포즈 받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지붕에 천막을 친 야외였고, 화려한 꽃 장식도 없었지만 무릎 꿇고 청혼하는 남자 앞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비싸고 화려한 청혼보다 이런 웃음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게 중요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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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도둑질한 죄
영화 속 토끼 ‘내 집 마련’ 고난에 젊은 세대, 눈물 지으며 공감해 …
공화국 거덜낸 도적떼가 뺏은 가장 비싼 약탈물은 청년들 미래
토끼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소박한 설계도를 들고 땅 밑으로 굴을 파 내려가며, 보송보송 귀여운 토끼는 내 집 마련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땅속 미로는 이미 다른 동물들의 집으로 꽉 찬 상태. 토끼는 더 깊이 파 내려가다 남의 집 벽을 뚫고 부수고, 놀라 도망치길 반복하다 끝내 지하 수맥을 건드린다. 착한 동물들이 힘을 합쳐 지하 마을 붕괴를 막고, 토끼도 마침내 제 몸 누일 보금자리를 찾는다.
지난 1월 개봉해 200만명 넘게 본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을 상영하는 극장에서, 픽사의 전통대로 본편 시작 전 보너스처럼 틀어준 단편 애니메이션 ‘버로(burrow·굴)’를 봤다. ‘어려운 시절 서로 도우며 이겨내자는 이야기인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극장을 나서는데,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청년들의 대화가 충격적이었다. “아, 정말 눈물 나더라. 꼭 평생 벌어도 집 한 채 못 얻는 우리 신세 같지 않냐?”
영화 리뷰 사이트를 뒤져 관객평을 살폈다. ‘여기서조차 ‘내 집 마련’ 따위를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싫다' ‘내 집은 지하로 들어가도 구하기 힘들군’ ‘내 공간 하나 마련하기 힘든 건 동물도 마찬가지’…. 단어마다 묻어나는 자조와 슬픔에 가슴이 무거웠다.
현실은 젊은이들을 점점 더 슬픔과 자조 속으로 몰아넣는다. 한 경제지 분석에 따르면, 서울의 ‘평균적 직장인’이 연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평균적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사는 데 걸리는 기간은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2017년 5월에 16년이었다가, 작년 11월 26.5년으로 10년 넘게 늘어났다. 불과 3년 반 만에, 은퇴할 때까지 일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불안에 청년들은 ‘영끌 투자’에 뛰어든다. 작년 말 2030세대의 소득 대비 대출 비율은 221.1%로 50대(207.0%)를 넘어섰다. 전년보다 15%p 넘게 올랐다. 드물게 시를 읽고 예술영화를 좋아하던 후배는 요즘 퇴근 뒤 샤워할 때도 재테크 유튜브를 틀어놓는다고 했다. “문학 책은 다 치웠어요. TV 옆에도 재테크 책을 둬요.” 착한 후배는 주식 계좌도 없는 선배에게 배당주와 미국 증시에 대해 한참 강의를 했다.
다른 통계로 고개를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취업한 적 없는 25~39세 청년 실업자 숫자가 사상 최대로 많다. 출산율은 0.84명으로 떨어졌다. 세계 꼴찌라 해도 할 말 없을 지경이다. 취직, 결혼, 출산, 내 집 마련이라는 평범한 인생 경로 자체가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누가 젊은 세대의 미래를 도둑질했는가.
‘도둑질’을 생각하다 1500년 전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국론’을 떠올렸다. 이 책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해적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계를 정복한 대왕 앞에 잡혀온 해적 두목은 ‘당신과 내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나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도둑질하니 해적이라 불리고, 폐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그 일을 하는 까닭에 황제라 불리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범죄 집단도 지휘 통솔 체계와 강령을 갖추고 규칙에 따라 약탈물을 나눠 갖는다. 미래를 잃은 젊은 세대가 결혼도 아이도 포기하는 동안, 이 정권의 공직자들은 땅 투기를 하고 ‘꼬우면 니들도 이직하라'고 조롱하고, 부동산 영끌 투자로 거액의 차익을 남기고선 국회의원이 된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 매도하고, 대법원 판결이 끝난 사건도 그들만의 정의를 위해 다시 불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 없는 국가는 도적 떼에 불과하다’고 했다. 공화국을 거덜내고 있는 도적 떼가 빼앗아간 가장 비싼 약탈물은, 다름 아닌 이 나라 젊은이들의 미래다.
-이태훈 기자, 조선일보(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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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거지’ 되는 것 말고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
“몇 달째 집 알아보다 대상포진 걸렸어요. 아이 계획은 없습니다. 집 사면 둘이 평생 갚아야 하는데… 아이까지 이 끝없는 불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네요.”
한 유명 경제 유튜버가 진행하는 생방송 부동산 상담에는 무주택자들의 고군분투 사연이 매주 수백 통씩 몰린다. 사연자들은 가족관계와 거주지, 현 자산, 월 소득 같은 각종 현실적인 용어들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녀 계획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신혼부부가 많다.
사연은 하나하나가 ‘인간극장’이다. 남편의 사망보험금 3억 원으로 ‘정신지체’ 아들과 살 집을 찾는 50대 여성, 은퇴한 부모와 취업준비생인 동생 생활비 대느라 월급이 남아나질 않는데 다음달이 전세 만료인 30대 남성, 미용실 보조로 최저시급 받으며 6년 간 3000만 원을 모았지만 최근 임신해 프로포즈를 받고도 집구할 길이 막막해 결혼을 포기하려는 20대 여성까지.
미국 아칸소에 정착해가는 한국 이민자 가족을 그린 영화 ‘미나리’에는 가장인 제이콥(스티븐 연)이 농장에 우물 만들 곳을 찾다가 어린 아들에게 “한국 사람은 머리를 써”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병아리 감별사로도 일하는 그는 병아리가 수컷으로 분류되는 순간 버려진다면서 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한다”고 한다. 미나리처럼 어디에 심어도 살아남는 한국인의 ‘DNA’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연 속의 무주택자들에게도 그런 한국인의 생명력이 엿보이곤 한다. 사는 게 바빠 성실히만 살아오다 어느 순간 벼랑 끝에 몰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집념이 전해져올 때가 있다. 배우자가 남긴 피 같은 보험금을 허투루 쓸까봐, 아기가 방긋 웃어주고 정비사와 택배기사로 ‘투잡’ 뛰는 남편이 고마워서, 암 투병 사실을 숨기고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 일용직을 하며 결혼자금을 보태준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서…. 진행자가 사연을 읽어 내려가다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정부에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어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이들은 나름의 절박한 사연을 안고 ‘영끌’의 세계로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각각의 치열한 삶들이 한국의 비좁은 땅을 두고 맞부딪히는 형국이다. 무주택자들이 독한 현실에 단련되는 사이 우리를 지탱해온 소중한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땅 투기하다 잘려도 시세차익이 평생 월급보다 많을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직, 근면, 절제는 허무한 슬로건일 수밖에 없다. 열정과 도전 같은 가치는 이제 사치로 여겨진다. 2030세대 상당수에게 직장은 대출을 받고, 갚기 위해 다니는 곳이 되어 버렸다. 결혼 상대마저도 ‘나만큼의 자산을 갖고 있어서 둘이 합치면 상급지 아파트로 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최근 출간된 베스트셀러 ‘돈의 심리학(저자 모건 하우절)’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원리에 대해 저마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내가 겪은 일은 간접적으로 아는 내용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돈의 원리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닻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투기와 반칙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유주택자가 아니면 언제든 실패한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우리는 무너져가는 가치들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차장, 동아일보(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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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흠표 부동산’은 끝났다
2·4대책은 ‘변 장관 정책’ 강조한 대통령
정책 또 실패해도 정권 탓 아니란 건가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 재임 초기 LH가 서울에 집 지을 뜻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LH의 서울 공급 물량은 1년에 1200채 정도였다. ‘서울이 얼마나 큰데 이것밖에 안 짓나?’ 변 사장은 LH 공급 물량을 10만 채로 늘렸다. 다만 실제 그만큼 공급한 건 아니고 직원을 몰아쳐 짜낸 ‘목표’였다. 그는 사업이 되도록 잘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변 장관은 공공 주도 공급 아이디어를 인정받아 국토부의 수장이 됐다. LH 사장 때처럼 직원들을 압박해 물량을 짜냈다. 전국 83만 채 공급 목표를 한 달 만에 만들어 ‘획기적 2·4공급대책’이라고 포장했다. ‘사업이 되도록 잘하겠다’는 돌파정신도 그대로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국토부 업무보고에서 2·4대책을 ‘변창흠표 정책’이라고 부를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이해 못 할 점은 문 대통령이 12일 LH 투기 의혹에 책임이 있는 변 장관을 단번에 자르지 않고 2·4대책의 기초작업까지 끝내라며 어정쩡하게 경질한 대목이다. 2·4대책은 땅 없이 일단 사업을 시작하고 보는 ‘공급 구상’이다. 사람들 사이에 믿고 사업을 맡겨도 되겠다는 공감대가 생겨야 머릿속 구상은 실제 공급이 된다. 대책을 제대로 추진할 생각이라면 책임자를 빨리 바꾼 뒤 정책을 손질해 구멍 난 신뢰를 메워야 했다.
‘어정쩡한 경질’의 이유는 첫째, 대통령이 변 장관을 너무 아낀 나머지 마무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둘째, ‘변창흠표 정책’이라는 브랜드를 유지해 정책 실패 시 책임을 변 장관에게 돌리기 위해서, 셋째, 임기 후에나 나올 실제 물량에는 관심이 없고 시간을 끌 필요가 있어서 등으로 추정된다.
한 보수 경제학자는 사람을 믿고 쓰는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일 것이라며 첫째 추정에 무게를 실었다. 글쎄, 대통령이 2월 업무보고 때 ‘변창흠표 대책’이라고 한 것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장관을 경질하는 자리에서까지 ‘변 장관 주도로 추진한 대책’이라고 했다. 국가의 핵심 정책이 무너질 판에 정책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 셈이다. 이게 단지 한 개인을 아꼈기 때문인지 의문이다.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 때 나온 24번의 부동산대책 중 ‘김현미표’가 있었나.
2·4대책의 핵심인 ‘공공 주도 개발’은 변 장관만의 아이디어도 아니다.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설계자인 김수현 전 대통령정책실장도 저서 ‘부동산은 끝났다’에서 공공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결국 정책 실패에 선 긋기, 분노가 줄어들 때까지 필요한 시간 벌기가 어정쩡한 경질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간이 중심이 돼 집을 짓는 건 지하철 공사 같은 것이다. 길을 막고 땅을 파는 과정에선 통행이 불편해지지만 나중에 모두가 편익을 누린다. 일부에게 집중되는 과도한 개발이익과 집값 급등에 눈을 감자는 게 아니다. 공급의 중심축을 민간에서 공공으로 바꿀 수 없는 만큼 민간에서 물량이 나오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LH를 토공, 주공으로 쪼갠다고 없던 신뢰가 생기는 게 아니다. 한 공무원의 말을 들어보면 현 정부는 민간 공급 확대 아이디어에 귀를 닫고 있다. “일정 기간 집값이 오르는 걸 감수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민간 공급을 늘릴 유인책도 검토할 수 있지요. 그런데 비판이 나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나요?” 2·4대책은 껍데기만 남긴 채 그냥 갈 것이다. ‘변창흠표 부동산’은 끝났다.
-홍수용 산업2부장, 동아일보(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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