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뇌(洗腦)]
[마음은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봄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세뇌(洗腦)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세뇌(brainwashing)는 강제로 사상을 주입해서 원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는 정반대인 신념을 갖게 만드는 행위다. 진화, 원자, 산소처럼 우리가 쓰는 과학 용어 대부분은 서양 언어를 동양 언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세뇌는 그 반대다. 영어의 브레인워싱(brainwashing)을 번역해 세뇌가 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에서 자주 쓰던 한자어(洗腦)가 번역되어 brainwashing이 되었다. 이 단어는 중국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에드워드 헌터(Edward Hunter)의 기사(1950)와 저서 ‘붉은 중국에서의 세뇌’(1951) 이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곧이어 6·25전쟁 중 북한에 억류된 미군 포로들이 미국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거짓) 자백했고, 포로 21명은 종전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해서 자유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례는 한국 전쟁에서 잡힌 포로가 대통령의 암살자로 세뇌되어 석방되는 영화 ‘만추리안 캔디데이트’(1962)의 소재가 되었다. 자극적 대중문화는 세뇌라는 개념을 널리 퍼트린 기폭제였다.
1960년대 이후에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은 공식적으로 세뇌를 해리성 장애에 속하는 정신병으로 분류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연구가 축적되면서 사람의 뇌를 씻어내고 사상이나 종교를 영구히 주입해 꼭두각시로 만드는 작업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면서 세뇌는 과학 영역에서 점점 ‘통속 심리학’(folk psychology) 영역으로 밀려났다.
최근에 사이비 종교가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거기 빠진 사람들이 세뇌되었다는 얘기가 자주 들린다. 그렇지만 공산주의건 사이비 종교건 사람 뇌를 씻어낼 수는 없다. 이념이나 종교에 빠지는 것은 진정으로 사람의 뇌가 개조되어서가 아니라, 포섭된 사람이 자신이 살던 더 큰 세상과 단절되어, 사이비들의 좁은 세상에서, 사이비들과 제한된 관계만을 맺기 때문이다.
세상은 바다처럼 넓고 다채롭지만, 힘든 사람에게는 한없이 불확실하며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사이비 종교나 극단적 이념 세계는 좁고 편견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확실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 이런 사이비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세뇌된 뇌를 다시 씻어내는 게 아니라, 사이비 세상에서 맺은 관계를 끊고 더 넓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데에 있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조선일보(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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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윤대현의 마음속 세상 풍경]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고 물으면 ‘뇌’에 있다는 대답이 늘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있는 가슴이란 답변이 많다. 실제 가슴에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설렘도, 이별의 슬픔도 그리고 긴장된 상황의 불안도 가슴에서 느껴질 때가 많다. 애정을 표시하는 다양한 손가락 하트 모양 유행이 꾸준하다. ‘하트(heart)’란 영어 단어엔 우리 몸의 엔진인 심장과,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란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그럼 마음은 뇌와 심장 중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뇌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불안해서 심장이 뛰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나면 뇌에 영향을 줘 불안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일까. 최신 연구에 따르면 모두 가능하다. 재밌게 표현하자면 마음이 뇌에도, 심장에도 있는 셈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오르는 경우는 자주 본다. 뇌가 심장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연구는 거꾸로 심장을 빨리 뛰게 했을 때 불안 행동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심장이 뇌에 영향을 주어 불안 행동을 일으킨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을 생체 운반체를 통해 실험 동물의 심장에 부착한 후 광원이 부착된 옷을 입혔다. 광원을 켰을 때 그 빛에 심장이 반응하여 심박 수가 늘었을 때 불안 행동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뇌 활성도를 측정하니 심박 수가 늘었을 때 뇌의 영역 중 몸의 감각을 수용 처리하고 불안 행동을 조절하는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실험적으로 이 영역의 활성도를 떨어트리니 불안 반응이 감소하였다. 심장이 뇌에 정보를 주어 불안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시스템과 반응은 경우에 따라 뇌보다 심장이 먼저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힘껏 뛰어 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신호를 뇌가 받아들여 불안 행동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불안은 불편하지만 위기관리 측면에선 핵심점 신호이다. 생존을 위해 오랜 시간 뇌와 심장이 협업해온 셈이다.
봄이 되니 겨울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따뜻한 봄기운이 우리 마음이 담겨 있는 심장을 편하게 이완해 몸의 긴장과 불안을 낮추어 주는 것일 수 있다. 봄의 나른함을 무기력감이라 생각해 다시 자신을 압박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봄은 이완 신호를 우리 몸에 보내고 있지만 눈뜨기가 무섭게 지구의 끊임없는 불안 소식이 들려온다. 그렇지만 이제 완연한 봄이다. 그리고 오늘은 하트가 넘치는 ‘화이트 데이’다. 봄과 사랑의 따뜻한 기운을 느끼는 여유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보자. 봄 햇살을 깊이 호흡하며 걷는 가벼운 산책이 봄과 내 심장의 따뜻한 소통을 가져온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조선일보(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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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벌써 개나리를 만났다. 봄이 왔구나. 찬 계절의 끝을 실감하며 얕게 안도한 것은, 지난겨울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겨우내 많은 부고를 들었다. 대부분이 조부모상이었다. ‘우리 나이가 그럴 때지.’ 부모 세대가 부모를, 또래 세대가 조부모를 잃는 시기.
바지런한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사진, 비디오 등 추억을 정리하는 일에 정성이셨다. 그 덕에 집에서도 앨범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곧잘 울곤 했다. 할머니 사진만 보면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떡해’ 통곡했다. 당시 할머니가 환갑 언저리 되셨을까. 젊고 건강한 할머니가 심지어 한 집 안에 계신데 뭐가 그리 서러웠던 걸까. 죽음은커녕 이별에 대해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길 만한 사건도 사연도 없었다. 추측건대 그건 그냥, 너무 소중했던 거다.
3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 뒤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나는 30년 전부터 이날을 생각하며 미리 두려워하고 미리 울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곧잘 끝을 생각했다, 소중할수록 더욱.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다가올 이별의 날을 수시로 예습하고 슬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슬픔의 방향이 허무가 아닌 연민으로 흐른다는 것이었다.
가령, 부모님이 환갑을 넘기면서부터는 꿈으로도 꾸기 싫은 그들과의 이별을 피할 수 없이 종종 상상한다. 함께 여행을 가고 맛있는 것을 먹고 웃고 떠들다 보면 지금이 문득 애잔해진다.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면서부터는 그와의 이별도 잦게 상상한다. 그 외에도 소중한 이와의 멀어짐, 혹은 나 자신의, 내 의지가 아닌 삶의 종료에 대해 문득문득 상상한다. 그럴 때마다, 슬프지만 단호해진다. 모든 것이 사소해지고 그야말로 추억 지상주의자가 된다.
미래의 나를 상정하고 추억을 만든다. 말하자면 추억을 쌓고 있는 순간에 이미, 미래에 서서 오늘을 추억한다. 얼마간은 건강하지 않다 자각하고 있지만 각인된 성정이 쉬이 고쳐질 리 없다. 고쳐 쓰지 못할 바에야 긍정하기로 한다. 15년 치 다이어리 보따리와 고등학생 때 받은 편지를 품고 사는 삶도, 다가올 이별을 미리 감각하며 곁의 이들을, 오늘 하루를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삶도, 사실은 크게 나쁘지 않다.
거리는 다시 벚꽃놀이 인파와 새봄의 환희로 차오를 테지. 그 기쁨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새 계절, 새 시작의 문턱에서 조용히 결심한다. 이 봄에도 나는, 나와 당신의 죽음을 수시로 예습하고 기억하겠노라고. 김영민 교수는 저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꽃이 피면 보러 가자, 아끼는 누군가와 혹은 그저 나 자신과.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만 어쩌면 해야 하는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동아일보(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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