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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벽돌폰이 어느덧 마흔 살] [벼랑 끝 소니]

뚝섬 2024. 4. 7. 05:40

[철부지 벽돌폰이 어느덧 마흔 살] 

[벼랑 끝 소니] 

 

 

 

철부지 벽돌폰이 어느덧 마흔 살

 

국내 이동통신 40년
소통을 바꾼 다섯 장면

 

1984라고 하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떠오른다. 독재 권력 아래 개인이 저항하다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보여준 비관적 세계 말이다. 그런데 1984년 한국에서 일종의 혁명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벽돌 한 장 크기의 카폰이 그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전화기에 선이 없는 ‘이동통신’ 개념이 생긴 지 40년이 됐다는 뜻이다.

 

벽돌폰으로 불리던 1세대 휴대전화 모토로라 다이나택 8000x.

 

카폰, 삐삐, PCS, 스마트폰…. 사람이 ‘이동’하더라도 ‘통신’할 수 있는 세상은 이렇게 진화해 왔다.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접어 귀에 가져대면 옛날 사람,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흉내를 내면 젊은이라고 하던가. 요즘 어린이들은 다이얼 돌리는 흉내를 내도 ‘전화 통화’를 떠올리지 못한다. 한국 이동통신의 40년 역사를 다섯 가지 주요 장면들로 살펴봤다.

 

#1. 달리는 ‘카폰’의 등장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헌트’. 안기부 직원이 차량에 설치된 묵직한 전화기를 들어 통화한다. ‘카폰’이라 불리는 차량 전화 서비스. 카폰은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재 SK텔레콤)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화됐다. 국내 이동통신의 태동이었다.

 

대통령과 고위급 관료, 재벌 임원들의 ‘특권’이던 카폰은 일반인에게도 ‘부(富)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당시 카폰 단말기와 전신 전화 채권 구입비 등 설치 금액이 400만원을 넘었다. 소형차인 현대자동차의 포니2 가격이 350만원, 짜장면 한 그릇이 평균 348~899원(1980~1989년)이던 시절에 카폰은 사치가 아닐 수 없었다.

 

과시 효과’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카폰용 안테나’만 차량에 부착했다. 카폰을 달 수 있는 재력이 경찰 단속을 피하는 방패가, 경비원이 경례하는 신분증이 되는 때였다.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쓸 일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1985년 체신부 발표에 따르면 카폰 한 대당 사용 시간은 하루 평균 2분, 한 달에 10번도 쓰지 않는 차량도 80대나 됐다. 1987년 12월 카폰 서비스 시작 3년 7개월 만에 가입자는 1만명을 돌파했다. 서비스 지역(수도권)이 아닌 부산(55명), 대전(26명) 등에 설치된 ‘무용지물 카폰’이 99대나 됐다.

 

#2. 숫자로 말하는 ‘삐삐’ 시대

 

“사람을 바삐 찾을 때 사용되는 삐삐가 연인들이나 부부간에 사랑의 전령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삐삐는 택시 운전사 부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1992년 6월 30일 조선일보)

 

무선호출기 삐삐는 1986년 3월 전화번호표시 방식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작은 액정에 노출되는 몇 자리 숫자는 암어(暗語) 시대도 함께 열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짧은 숫자에 담기 위해 고민, 또 고민했다. ‘열열히사모(1010235)’는 숫자의 음절을 따 만든 고백이었고, ‘1 177155 400(I MISS YOU)’는 영어와 비슷하게 생긴 숫자로 전하는 애정이었다. 발신자 없는 ‘1004(천사)’에 풋사랑 젊은이는 가슴이 뛰었고, 학생들은 ‘0027(땡땡이칠래)’로 탈출을 모의했다.

 

주머니에 동전 몇 개는 짤랑거려야 하는 시대였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대학생들은 응답을 기다리는 이에게 빨리 답을 주고 싶은 초조함으로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섰다. 삐삐로 ‘8282(빨리빨리)’를 받은 직장인들은 공중전화를 향해 뜀박질했고, 커피숍에서는 “번 호출하신 분!”이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곤 했다.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하나씩 놓인 커피숍이 인기를 끈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97년, 삐삐 가입자는1500만명을 돌파했다.

 

#3.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자니?” 감성 충만한 밤에 보내고, 다음 날 이불을 차는 미련의 메시지를 보내게 된 건 ‘1인 1전화’ 시대부터였다. 1990년대 후반, 휴대전화가 10~20대로 사용자층을 넓히면서 통화가 아니라 문자메시지로 소통하는 ‘엄지족’(엄지손가락으로 문자 보내는 사람)이 등장했다. 처음에 작은 액정에 담을 수 있는 말은 40자에 불과했다. ‘안냐세요’(안녕하세요)’ ‘빨리오3(빨리 오세요)’ 같은 줄인 말과 -(%:〉〈:%)- (뽀뽀하는 쥐), (((((@)(김밥 먹자)는 이모티콘에 마음을 눌러 담았다.

 

2001년 기준 하루 평균 6400만건의 문자 메시지가 전파를 탔다. 2008년 LG전자가 처음 연 ‘휴대폰 문자메시지 보내기 대회’ 우승자는 17세 남학생. 59자의 문자를 38초 만에 전송해 상금 1000만원을 챙겼다. “한 달에 많게는 8000개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던 그는 “한국 학생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바뀐 것”이라고 했다.

 

1997년 SK텔레콤이 ‘스무살의 TTL’이라는 브랜드로 히트를 치자 경쟁사들은 “짜장면 시키신 분~”(신세기통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KTF) 같은 광고로 응수했다.

 

#4. 정신까지 지배당한 ‘스몸비’

 

‘손대면 톡하고’ 바뀌는 화면은 스마트폰 세대에 등장한 구동 방식이다. 2009년 아이폰과 갤럭시로 대변되는 ‘스마트폰’이 출현하고, 2011년 끊김없이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LTE 기술이 탑재되자 ‘스몸비(스마트폰+좀비)’가 도시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똑똑한 휴대전화(스마트폰)가 사람들의 눈과 손, 정신을 지배한 것이다.

 

건당 수십 원의 비용을 내야 하는 문자메시지가 무료로 전환된 ‘카카오톡’은 스마트폰 보급을 확대한 일등 공신. 유튜브와 넷플릭스 같은 OTT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동영상 시대’도 이때 열렸다. 올해 1월 기준, 우리 국민들은 전체 트래픽(2만6198TB)의 54%를 동영상 시청에 쓴다. 문자메시지 대신 친구와 지인의 SNS에 댓글을 남기는 게 현재의 소통 방식. 데이터의 20%는 SNS에 사용한다.

 

스마트폰 시대에 ‘지갑’은 효용을 상실했다. 전자 결제가 일상화하고, 정부의 모바일 신분증이 민간 앱에서도 통용되면서 신분증, 카드가 빽빽하게 꽂힌 지갑이 쓸모없어진 것이다. “스마트폰을 놓고 나왔더니 카드도, 신분증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경험담이 넘친다.

 

#5. 일상 장악 시대

 

이동통신은 이제 우리 일상을 장악했다. 운전대를 잡으면 내비게이션 ‘티맵’(SKT)을 켜고, 키즈 전용 플랫폼 ‘아이들나라’(LG유플러스)로 육아를 한다. 자영업자들이 전화를 받지 못할 떄 대신 예약을 받아주는 AI통화비서(KT) 서비스도 나왔다. AI(인공지능)의 챗GPT가 자소서를 쓰고, 외국어 자동 번역 서비스의 등장으로 해외에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1인당 1.9대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태블릿PC·스마트워치 등 IT 기기를 4~5개씩 쓰는 것도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구독자 19만1000명을 보유한 유튜버 더신자는 “스마트폰 2대와 스마트워치 1대, 노트북 1대 등 총 4대의 기기를 사용한다”고 했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의 장점을 합친 ‘접는 스마트폰’까지 나왔다. 간단한 메시지는 작게 접은 상태에서 확인하고, 동영상 등을 시청할 때는 모두 펼쳐 큰 화면으로 보는 식이다. 중국 화웨이는 올해 2분기 세 번 접는 스마트폰을 출시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스마트폰은 또 다른 자아(自我)이다. 내가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은 내 생활 방식을, 동영상과 SNS에서 추천하는 콘텐츠는 나의 관심사를 각각 대변한다. 이런 세상에선 ‘소통’만을 위한 휴대전화가 낭만처럼 보이기 마련. 103만명은 아직도 폴더폰으로 불리는 피처폰을 사용하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자가 늘어나자 입장할 때 휴대전화를 압수하는 카페도 성업 중이다.

 

-이미지 기자, 조선일보(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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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소니

 

PC·TV에 이어 스마트폰사업마저 15% 축소키로

주력하던 모바일 기대 못미쳐… 예상 손실 당초 전망의 4배 엔터테인먼트로 변신 하다

소니 키운 기술 인력 잃고 몰락

 

소니의 추락에 끝이 없다. 전성시대를 이끈 PC사업을 매각하고 TV사업을 자회사로 떼어낸 데 이어 이번에는 스마트폰사업마저 15% 축소하기로 했다. 여기에 상장 이후 56년 만에 처음으로 배당마저 포기했다. 기술 혁신으로 세계 전자업계를 이끌며 애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에게 영감(靈感)을 주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점점 세계 전자업계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모양새다.

소니가 배당을 포기하기로 한 가장 큰 원인은 스마트폰사업 부진이다. 소니는 2014 회계연도(올 2분기~내년 1분기)에 2300억엔(약 2조2000억원)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두 달 전 예상 손실액은 500억엔(약 4780억원)이었으나 스마트폰 판매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손실이 4배 넘게 불었다.

모바일에 미래 걸었지만 실패로

모바일사업은 히라이 가즈오(
平井一夫) 소니 최고경영자(CEO)의 승부수였다. 그는 2012년 CEO 취임 후 스마트폰을 소니의 3대 동력 중 하나로 선정해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소니는 삼성전자·LG전자 등 경쟁사보다 제품 출시가 늦어 번번이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일본 내수 시장에서도 애플 아이폰에 밀리며 점유율이 낮아졌다.

모바일사업 축소는 소니가 소비자용 전자제품 부문에서 마이너 업체로 전락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소니 모바일 부문을 총괄하는 스즈키 구니마사(
鈴木?) 사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소니 브랜드가 프리미엄으로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는 떠날 것"이라고 했다. 중저가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고가 스마트폰과 웨어러블 기기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은 풀이했다.

과거 기술 집착이 TV사업 몰락으로

소니의 사업 축소는 올 들어 두 번째다. 올 초에는 TV 부문을 자회사로 떼어내며 5000여명을 감원했다. TV는 한때 세계시장에서 '소니 왕국'을 건설했던 제품이다.
소니는 트리니트론(Trinitron)·평면 브라운관 등 혁신 기술로 세계 TV 시장을 휩쓸었다. 1968년 개발한 트리니트론은 1개의 전자총으로 3개의 전자빔을 내는 방식이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을 앞세워 브라운관 TV의 원조인 미국 RCA를 무너뜨렸다. 1996년에는 평면 브라운관을 개발해 또 한 번 시장을 흔들었다.

하지만 기존 기술에 대한 집착은 소니를 실패로 이끌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업체들이 LCD(액정화면표시장치) TV로 판을 바꾸는 시기에도 소니는 브라운관을
고집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었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절대 강자였던 소니는 그 '꿀맛'에 도취돼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뒤늦게 방향을 틀었지만 핵심 부품인 LCD 기술이 모자라 LCD 패널을 삼성 등으로부터 공급받아 TV를 생산했다. 이 때문에 TV 부문은 8년간 연속 적자를 냈다.

엔터테인먼트로 변신 시도하다 기술 잃고 몰락

소니를 현재의 처지로 만든 것은 '기술 DNA 상실'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1995년 CEO로 취임한 이데이 노부유키(
出井伸之)는 영화·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글로벌 소니'를 외치며 미국식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고, 사업 부문을 25개 회사로 쪼갰다. 단기 성과 평가 시스템도 강화했다. 그러자 소니를 키워온 기술자들이 "더 이상 기술 회사가 아니다"며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기술의 소니'에 마침표 찍은 것은 외국인 CEO 하워드 스트링어였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전문가인 스트링어는 2005년 CEO 취임 이후 줄곧 기술 부서와 갈등을
빚으며 미래 성장 동력 발굴에 실패했다.

2012년 CEO로 취임한 히라이 사장은 스마트폰 집중을 선언하며 기술 회사로 본질을 찾고자 했다. TV에서의 영광을 스마트폰에서 재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로 결론나고 있다. 이제는 "소니가 결국 제조업을 포기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온다.

 

-조선일보(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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