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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0조 油田 독식 노리는 일본…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

뚝섬 2023. 2. 12. 06:01

[9000조 油田 독식 노리는 일본…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한·일 유전 개발 경쟁]

[‘이해진·손정의’가 시동 건 韓日경협 확대… ‘1석 4조’의 황금 카드]

[독립 위해 日帝에 폭탄 투척… 31세, 24세 꽃다운 삶 희생]

 

 

 

9000조 油田 독식 노리는 일본…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한일 정상회담 앞두고 다시 주목받는 ‘7광구 

 

대한민국에는 잊힌 영토가 있다.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200㎞ 떨어진 바다 밑에 있는 남한 면적 80%( 82000) 크기의 대륙붕, 일명 ‘7광구’다. 한때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석유가 묻혀 있다’는 장밋빛 전망에 온 국민을 산유국의 꿈에 부풀게 했던 바로 그곳. 1970년대 가수 정난이의 히트곡(’제7광구 검은진주’)으로도 잘 알려진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십년간 석유 한 방울 얻지 못한 채 버려진 비운의 땅이다.

 

그런 7광구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다음 달 중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관측되면서 강제징용·위안부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에너지·안보 현안이 걸린 7광구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7광구는 한국과 일본이 지난 1978 한일 공동개발구역(JDZ) 협정을 맺고 함께 석유 개발을 추진했다가 1980년대 중반 일본의 일방적 개발 중단으로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 미국 정책연구소인 우드로윌슨센터에 따르면 7광구 일대에는 천연가스가 사우디아라비아의 10, 석유는 미국 매장량의 2.5배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유가(배럴당 80달러)로 계산하면 매장 석유의 잠재적 가치만 9000조원에 달한다.

 

7광구 공동 개발 협정은 발효된 50년이 되는 오는 2028 6월에 종료되는데, 종료 3 전인 2025 6월부터 어느 쪽에서든 조약 종료를 통고할 있다. 사실상 윤 대통령 임기 내에 협정의 존폐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 취임 후 정식으로 처음 열리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랫동안 끊겼던 7광구 개발을 재개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7광구, 5 일본으로 넘어간다?

 

7광구는 원래 한국이 단독으로 개발하려 선점했던 지역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 일본·중국보다 먼저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일정 영토에 대한 관할권) 선포했다. 1968년 유엔에서 일대 대륙붕에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발 빠르게 움직인 것. 대륙붕은 해저 200m 깊이에 있는 완만한 경사의 해저지형을 말한다. 대륙붕이 어떤 국가의 영토에서 이어졌는지 여부를 따져 개발권을 인정했던 당시 국제법 판례에 따라 한국의 독점 영유권은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7광구와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던 일본이 거세게 반발하며 공동 개발을 요구했다. 해저에서 석유를 파낼 시추 기술이 없었던 한국으로선 시추 기술 강국인 일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일 양국은 1980년대 초까지 7광구에서 소량의 천연가스를 발견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7광구 개발 사업은 1986년 일본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돌연 개발을 중단하면서 제동이 걸린다.

 

일본이 개발 사업에서 발을 뺀 이후 한국은 지금까지 7광구 내에서 시추 작업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협정 당시 양국이 공동으로 시추·탐사를 수행해야 한다 독소 조항에 걸려 조사선 파견조차 어려웠기 때문. 일각에선 ‘담당 부처인 외교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우리 정부는 다양한 접촉 경로를 통해 일본에 (7광구 공동개발) 협정 이행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구체적 협의 내용은 외교 사안이기 때문에 공개하기 어렵다’는 입장만 밝히고 있다.

 

정상회담서 7광구 매듭 풀어야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보다 한국이 불리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협정이 만료될 경우 일본은 과거 한일 어업협정을 통해 양국 사이 바다에 그은 중간선을 근거로 7광구 대부분을 차지하려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히 한일 해양 중간선만 놓고 보면 7광구 지역 대부분이 일본 영해에 해당한다. 안세현 서울시립대 교수(국제관계학과)는 협정이 끝난다고 바로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재판소로 경우 치열한 영유권 다툼을 벌이게 텐데 동중국해 지역 탐사 데이터가 많고 국제 기구에서 우리보다 영향력이 일본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이라며 일본이 7광구 법정 다툼에 독도 문제까지 끌어들이면 사안은 복잡해질 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제 법정으로 가기 전에 한일 지도자가 외교적으로 7광구 문제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일본과 실무급·고위급 회담을 가져 이번 정상회담에서 ‘향후 한일 양국이 7광구 공동개발 협정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는 합의라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7광구와 관련해 우리 정부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한 대학 교수는 “국가안보실에서도 (7광구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며 “무엇보다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지현 제주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1978년 한일 공동개발협정은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화해를 위한 모멘텀(동력) 차원에서 체결됐다”며 “이후 40여 년 만에 7광구 문제에서 일본과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강제 징용, 수출 규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장기간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에도 큰 외교 성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설득할 한국의 카드는?

 

일본이 그동안 7광구 사안에서 보여온 태도를 감안하면 한일 양국이 단번에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공동 개발 재개 요청을 줄곧 묵살해왔기 때문이다. 채굴에 따른 경제적 이득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을 향해 자원을 개발하자고 찔러봤자 소용이 없다는 .

 

이 때문에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일본을 상대로 경제적인 명분보다 중국 팽창 저지를 위한 안보 동맹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협정을 연장하면 7광구는 한일 양국이 나눠 갖지만, 협정을 파기할 경우 중국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점을 어필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7광구 바로 옆 바다에서 천연가스 채굴을 하며 호시탐탐 동중국해 유전을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일 협정 때문에 중국이 7광구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2028 한일 조약이 종료될 경우 바로 군사력을 앞세워 7광구 일대 영해권을 행사하려 있다는 전망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세력 견제를 위해 한·미·일 공조가 필요한 미국을 설득해 일본이 협정 이행에 나서도록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장은 “과거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에서 보듯 중국은 동중국해에서 일본 안보의 최대 위협국”이라며 “현재 동중국해에서는 지하자원 못지않게 안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을 향해중국 저지 위한 한일 동맹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줘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협정 파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대비해야 한다. 일본 정부에 ‘일본이 공동 개발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내용의 항의 문서를 보내는 등 일본이 협정 이행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지현 교수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은 열심히 7광구 개발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이 무시했다’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며 “계속 국제적으로 시끄럽게 해서 일본이 주판알을 튕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인준 기자, 조선일보(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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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유전 개발 경쟁 

 

우리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란 말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한 것이 동해-1 해양 가스전이었다. 1998년 한국석유공사가 울산에서 동남쪽으로 58㎞ 떨어진 해저에서 가스 시추에 성공해 2004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그 덕에 한국은 세계 95번째 ‘산유국’이 됐다. 하루 34만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스와 자동차 2만대분의 초경질유를 생산했다. 인근에 추가로 개발한 동해-2 가스전은 2016년부터 가스를 생산했다. 작년 말로 이 동해 가스전은 생산을 마무리했다.

 

▶일본이 동해 EEZ(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 시추에 나선다고 한다. 일본 시마네현에서 북서쪽으로 130㎞, 포항에서는 160㎞ 떨어진 지점이다. 상업성이 확인되면 2027년 개발 준비에 착수해 2032년쯤 천연가스를 생산하겠다고 한다. 일본이 1990년 니가타현 앞바다에서 생산을 개시한 이후 30여년만에 자국 인근 바다에 해양 가스전을 개발하는 것이다.

 

동해 못지않게 한국과 일본 사이 해저 자원 개발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곳이 제주도 남단 동중국해에 있는 제7 광구다. 1968년 작성된 미국 해양연구소의 ‘에머리 보고서’에서는 동중국해에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석유 자원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석유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의 10배라는 주장도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7 광구 영유권을 선포했다. 일본의 허를 찌른 선제 선언이었지만 해저 자원을 개발할 돈과 기술이 없었다. 결국 한·일 양국이 7광구를 공동 개발하기로 1978년 50년짜리 협정을 맺었다.

 

▶양국이 공동 시추한 제7 광구 7곳 중 3곳에서 석유와 가스가 나왔다. 1980년대 온 국민이 산유국 꿈에 부풀었다. “제7 광구, 검은 진주~”라고 강렬하게 후렴구를 외치는 유행가 ‘제7 광구’까지 나왔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다며 일본이 손을 뗐다. 한국이 공동 개발을 요청해도 미적댔다. 그새 국제해양법이 바뀌어 대륙붕 대신 배타적경제수역 개념이 등장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이 훨씬 유리해졌다. 1978년 발효된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 협정은 2028년 만료된다. 제7 광구의 80%가 일본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새 중국도 7광구 인근에서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울산 앞바다 해양 가스전이 생산을 종료한 시점에 공교롭게도 일본이 동해에서 해양 가스전 개발에 나설 것이라는 뉴스가 심상치 않다. 한·일, 그리고 한·중·일 사이에서 벌어질 바다 자원 전쟁의 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강경희 논설위원, 조선일보(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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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진·손정의’가 시동 건 韓日경협 확대… ‘1석 4조’의 황금 카드

 

[송의달 선임기자의 Special Report]

 

불붙는 韓日 경제 협력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LINE)과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의 야후재팬은 한지붕 식구이다. 두 회사가 절반씩 지분을 소유한 A홀딩스가 작년 3월 출범하면서부터다. A홀딩스 밑에 Z홀딩스가 있고, 그 아래 라인과 야후재팬이 자회사로 작동한다.

 

한국과 일본 경제 동맹의 물꼬를 연 이해진(왼쪽)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와 손정의 (일본명 마사요시 손)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조선일보DB

 

2019년 11월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동맹 결의를 불씨로 한·일(韓日)이 합작한 일본 최대 빅테크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라인 관계자는 “중국 알리바바·텐센트 연합을 능가하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을 목표로 인공지능(AI), 전자상거래, 블록체인 등에서 일체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A홀딩스의 아시아 지역 월간 사용자는 2억3000만명에 달한다.

 

제2, 제3의 한·일 기업 동맹도 줄을 잇는다. LG화학과 일본 도레이가 총1조원 이상 투자하는 2차전지 합작사, SK이노베이션과 일본 화학전문기업 도쿠야마의 반도체 소재 합작기업 등이 작년 하반기 출범했다. 전문가들은 양국 경협 확대는 일석사조(一石四鳥)의 효과를 내는 한국 경제의 황금 카드라고 말한다.

 

한·일 1인당 GDP 추이

 

청년 일자리 해결 돌파구 열려

 

원동력은 혐한(嫌韓)과 반일(反日) 와중에도 봇물처럼 늘어나는 경제·문화 교류이다. 지난해 양국간 무역규모는 전년 대비 18% 늘었고 일본의 대한(對韓) 직접투자는 25% 증가했다. 2021년 일본 넷플릭스 최상위 TV프로그램 10개 가운데 6개가 한국 콘텐츠였다. 한국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鬼滅)의 칼날’이 큰 인기였다.

 

이런 흐름을 살리면 한국 경제의 최대 고민인 청년 일자리 문제부터 해결할 수 있다. 한국의 대졸 취업률은 5년 넘게 60%대인 반면, 일본의 대졸 취업률은 같은 기간 매년 90%를 웃돈다. 일본 청년 구직자 한 명당 직장은 1.18개이다.

 

(좌) 2018년 11월 5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18 일본 취업 박람회’ 모습. 소프트뱅크·닛산자동차·전일본공수항공(ANA)과 일본 3대 테마파크인 하우스텐보스, 세계 LCD 유리 20%를 생산하는 일본전기초자 같은 우량 기업들이 한국 청년 700여명을 뽑기위해 왔다. 6200명이 넘는 한국 청년들이 이 행사에 몰렸다./(우) 2018년 11월 5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18 일본 취업 박람회’에서 청년들이 일본 기업 부스를 돌며 일본 취업 정보를 얻고 있다./조선일보DB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작년 11월 한일경제인 회의에서 “양국 경제계가 구인(求人) 플랫폼을 공동운영하고 취업 박람회를 활성화하자”고 말했다. 외국어 구사력이 뛰어나고 조직 충성도가 높은 한국 젊은이들은 일본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국인 인재이다.

 

中 경제 과잉 의존 막는 버팀목

 

양국간 문턱을 낮추면 한국의 4배 면적에 1억 2500만명의 새 내수 시장이 창출돼 우리 제조·서비스업의 전면적 확장이 펼쳐진다. 이창민 한국외대 교수(일본학)는 “매년 100조엔(약 1036조원)이 넘는 일본 실버 산업 시장이 한국 기업들의 유력한 공략 대상”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65세 이상 고령층이 총인구의 30%에 달하는 세계 최대 노인 국가이다.

 

일각에선 양국 경제 통합시 자동차·농업 같은 분야에서 한국의 피해를 우려한다. 하지만 1998년 일본 문화 개방 당시 ‘한국이 왜색 문화로 뒤덮일 것’이라는 비관론과 정반대로 한국 ‘K팝’은 세계 최강(最强)으로 도약했다.

 

기업분석연구소인 ‘CEO스코어’의 김경준 대표는 “한국인은 문을 열수록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한다. 일본 개방을 ‘매기 효과’로 활용하면 경제 전반이 선진국 수준으로 확실히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으로선 한국의 IT와 스피드, 젊은 인력을 흡수해 노쇠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잇점이 있다.

 

(좌) 2019년 12월 4일 낮 '2019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MAMA)가 열린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돔 인근에 K팝을 즐기는 일본 팬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우) 2019년 5월15일(미국 현지 시각), 미국 CBS방송 인기 토크쇼 '더 레이트 쇼'에 BTS가 출연해 1964년 비틀스의 미국 첫 데뷔 방송 무대를 재연하고 있다. BTS는 55년 전 비틀스가 섰던 바로 그 무대에서, 비틀스 초기 패션인 바가지 머리와 검은 양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드럼 중앙에 'THE BEATLES'란 로고 대신 'BTS'가 적혀 있다./조선일보DB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공동 가치를 바탕으로 준(準)경제 동맹 형성 효과도 생긴다.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경제학)는 “양국 합계 GDP 7조달러의 경제권이 가시화하면 미국이나 중국 어느 나라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특히 중국이 경제 제재를 가해도 이겨내는 강력한 맷집이 생긴다”고 말했다.

 

지난해 무역과 소재·부품·장비에서 우리나라의 대중(對中) 의존도는 25%, 30%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경제의 긴밀한 통합은 거대 중국으로 쏠림을 막는 버팀목이자 균형추가 된다는 분석이다.

 

-송의달 선임기자, 조선일보(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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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위해 日帝에 폭탄 투척… 31세, 24세 꽃다운 삶 희생

 

이봉창과 윤봉길

 

올해는 이봉창(1901~1932) 의사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일제에 항거해 의거를 일으킨 지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의거 당시 두 사람은 각각 31세와 24세 청년이었어요. 이들은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하기 전에 각각 ‘도시의 모던보이’와 ‘농촌의 계몽운동가’로 볼 수 있는 삶을 살았어요.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결국은 조선 독립을 위한 같은 길을 걸었죠. 여기서 ‘의사(義士)’란 ‘의로운 뜻을 지닌 선비’란 의미예요. 그들은 어떤 의로운 뜻을 갖고 의로운 행동을 했을까요?

 

①이봉창 의사의 모습. ②한인애국단 본부로 불린 중국 상하이 황푸(黃浦)구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자택에서 김구(왼쪽)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③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의거 때 던진 물통 폭탄의 모형. 가죽 끈을 달아 어깨에 메도록 제작됐어요. ④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과 맞바꿔 찬 회중시계. 김구 선생은 이 시계를 평생 간직했다고 해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문화재청·위키피디아

 

이봉창 “차별받는 동포를 위해 일하겠다”

 

“일본인의 습관을 빨리 배워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다!” 일본인으로부터 기술을 습득해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청년이 있었어요. 이봉창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에 그는 열심히 직장에 다녔어요. 열두 살 때부터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고요. 17세이던 1918년엔 용산역에 취직해 4년 동안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근무했습니다. 철도는 당시의 최첨단 교통수단이었고 용산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지였죠. 그러나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에 비해 승진과 봉급에서 철저한 차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일하는 게 오히려 차별이 덜하다’는 말을 듣고 1925년 일본으로 갔습니다. 철공소 같은 여러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죠. 그는 술 마시고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고 골프를 치기도 했어요. 이런 모습을 보고 그를 ‘근대의 최신 소비문화를 누렸던 모던보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1928년 11월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그의 인생 행로를 완전히 바꿔 놓게 됩니다. 일을 하루 쉬고 즉위식을 보러 갔으나, 경찰이 그를 수색하며 한글 편지를 발견한 뒤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구금한 거예요. 이봉창은 결심했습니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임금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이제 우리 2000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해야겠다.” 일제의 조선인 차별을 실감하면서 민족정신에 눈을 뜨게 된 거죠.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에 들어간 이봉창은 일왕 암살 계획을 밝혔어요. 그리고 김구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겠습니다.”

 

1932년 1월 8일, 그는 도쿄 요요키 연병장에서 일왕 히로히토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져 명중시켰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어요. 일왕은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던 거지요.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 형무소에 갇힌 그는 그해 10월 10일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습니다.

 

윤봉길 “나는 일본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

 

충남 예산 출신의 윤봉길은 한때 일본의 사회 체제 속에서 살려고 했던 이봉창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어요. “일본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 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자퇴했답니다. 그는 충남 지역에서 일어났던 3·1 운동을 보고 일본의 잔학함을 깨닫게 됐어요. 그리고 일본어 시간에 “나는 일본인입니다”란 문장을 따라 하던 짝꿍의 발을 밟으며 “왜놈 된 기분이 어떠냐?”고 쏘아붙였다고 합니다.

 

이후 한학을 공부하던 청년 선비 윤봉길은 1926년부터 농민 계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월진회’를 만들어 문맹 퇴치와 한글 교육,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는데, 농민을 깨우쳐야 조선이 산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이런 결심을 한 계기가 있었다고 해요. 글을 모르는 한 농부가 근처 무덤 묘비를 모두 뽑아 와 윤봉길에게 “아버지 무덤을 찾아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의 나이 22세이던 1930년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을 남기고 훌쩍 만주로 떠났습니다. ‘장부(건강하고 씩씩한 사내)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1931년 8월 윤봉길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서 이듬해 4월 한인애국단에 입단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고 했죠.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겸 전승 기념 행사를 열었습니다. 윤봉길은 이 행사장에서 귀빈석을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거사는 성공이었습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 등이 사망했고, 많은 일본인 관리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 순국했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윤봉길은 새로 산 자신의 회중시계(품에 지니는 시계)를 김구 선생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6원,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바꾸시죠.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구는 윤봉길의 시계를 평생 간직했다고 합니다.

 

우리 독립은 독립운동이 있었기 때문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실패한 듯 보였지만 그 영향은 컸습니다.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물론, 국제적 관심을 일으켰던 거죠.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 의거를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고 써서 일본이 상하이 사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하이 사변은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상하이에서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무력 충돌 사건이에요.

 

윤봉길 의거를 보도한 중국 언론은 “수십만 중국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인 한 명이 해냈다”고 했고, 장제스 중국 총통은 윤 의사 가족에게 ‘장렬천추(壯烈千秋·씩씩한 의기가 천년을 빛나리라)’란 휘호를 써 줬습니다. 두 의거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세계인에게 각인시켰고 중국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광복 이후 김구는 윤봉길의 모친 김원상 여사를 만나 “아드님 덕분에 이렇게 광복이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처럼 끈질긴 독립 투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한국인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1943년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강제 점거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했을 때 한국은 여기서 제외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 영토로 남아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연합국 지원으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어요. 이때 일본 대표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는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었던 거지요. 우리의 독립운동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는 상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의거 때 던진 폭탄은 무엇이었을까요? ‘도시락 폭탄’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과 다릅니다. 윤 의사는 현장에 도시락 모양 폭탄과 물통 모양 폭탄 두 개를 가져갔어요. 하지만 실제로 던진 것은 물통 폭탄 하나였습니다.

 

도시락 폭탄을 자결용으로 준비해 간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윤 의사는 “2개를 모두 던질 여유가 없었고 물통 폭탄에 끈이 있어 던지기 쉽다고 생각해 도시락 폭탄을 내려놓고 물통 폭탄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두 폭탄 모두 던질 계획이었다는 것이죠.

 

-조유미 기자/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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