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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마지막 국군의 날, 그날의 일기장엔] ....

뚝섬 2024. 10. 3. 08:30

[박정희의 마지막 국군의 날, 그날의 일기장엔 ]

[과학기술을 통해 부국강병의 발을 내딛다]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박정희의 마지막 국군의 날, 그날의 일기장엔

 

[김창균 칼럼]

陸·海·空 모든 장비 北에 열세
주한 미군 완전 철수 일방 통보
朴 정권 71년부터 전시체제
79년 "역사상 첫 막강 국군"
재래식 역전하자 北核 새 위협
朴이라면 어떻게 돌파했을까

 

조선일보 1970년 6월 6일 자 1면 톱 제목은 하루 전 발생한 “해군 방송선 피랍”이었다. 이름이 방송선이지 어선단 보호 임무를 맡은 현역 해군 함정이었다. 그런데도 단 15분 교전만에 우리 승무원 20명 대부분이 사상된 상태에서 납치당했다. 120톤급 우리 함정은 최대 속력 12노트, 40mm 기관포인 반면, 250톤급 북한 함정은 최대 속력 25노트, 75mm 기관포였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여론은 들끓었다. “고기잡이 배도 아니고 어떻게 해군 함정이 끌려가느냐.” 해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육군의 주력 탱크 M-4는 76mm포, 북한군의 T-54, T-55는 100mm포였다. 미국이 2급 동맹국에 주는 F-5는 북한의 최신예 미그 21의 적수가 아니었다. 6·25 이후 북한은 소련 현역군 수준으로 장비를 제공받은 반면,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질린 미국은 2차대전 때 쓰던 퇴역 장비로 한국군을 무장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건군 76주년 국군의 날 시가 행진 세종대왕상 앞 관람 무대에서 지대지 미사일 현무-3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두 달여 뒤 애그뉴 미 부통령이 주한 미군 감군 협의차 방한했다. 김정렴 비서실장 회고록은 박정희 대통령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2주일 동안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회담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사색하고 메모하고, 다시 사색하고 메모를 수정했다.” 8월 25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회담은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4시에 끝났다. 점심은 커피와 케이크로 대신했고 아무도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 다음 날도 청와대 조찬 형식으로 1시간 30분 동안 추가 회담이 열렸다. 그래서 “7사단 2만명 이상의 감군은 없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그뉴는 한국을 출발한 기내에서 “5년 내 완전 철수가 기본 방침”이라고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충격 속에 침묵했다.

 

적은 버거웠고, 동맹은 못 미더웠다. 박 정권은 ‘자주국방’을 위한 전시체제로 재편됐다. 방위산업을 총괄하는 오원철 제2 경제수석이 1971년 임명되고,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총포, 탄약, 로켓 등 군사 장비별로 개발을 맡는 기구 개편을 했다. 오 전 수석 회고록 5권과 7권에는 ADD 연구원들이 기름 범벅 옷도 못 갈아 입고 밤샘 작업으로 병기를 개발해 나간 기록들이 담겨 있다. 과로와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기도 했다. 1973년부터 국군의 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데는 이런 시대 상황이 작용했다.

 

1977년 6월 23일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화력 시범 대회가 열렸다. 2000여 명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보병·전차·포병·공병 합동 공격이 선보였다. 71년 11월 80mm 박격포부터 77년 5월 한국형 장갑차까지 시기별로 개발된 20여 개 국산 무기가 전시됐다. “이제 미군이 떠나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박 대통령 발언이 신문에 담겼다.

 

1978년 9월 26일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탄(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북한보다 10년 늦게 방위산업에 착수한 한국이 북한을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소련 국방부 기관지 ‘붉은 별’은 “한국의 유도탄 생산은 핵무기 생산의 예고”라는 제목으로 관련 보도를 했다. 70년대 말 극장 영화 상영 직전 대한뉴스에서 군사 장비 화력 시범이 나올 때마다,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맨날 똑같은 타령”이라고 투덜댔다. 당시 실제 상황을 알고 나니 선배 세대들의 분투에 새삼 숙연해진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장에 동원된 장비 중 80% 이상이 국산이었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막강한 국군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리라. 공산 침략 도배들과 혈투를 거듭하며 막강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국가적 소명을 이뤄냈다는 뿌듯한 감회가 느껴진다. 비극적 최후를 맞기 25일 전이다.

 

10·26 대통령 시해에 이어 12·12 군사반란을 거치며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제2 경제수석실은 폐지됐다. ADD엔 숙청 바람이 불면서 미사일 개발 요원들이 대거 잘려 나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형 미사일은 엉터리다. 담당 팀을 해체시키라”고 지시했다(오원철 회고록)고 한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미국 지지에 몸이 달았던 신군부와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신경이 곤두섰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짐작할 뿐이다.

 

70년대 초 3대1로 열세(영국 전략연구소)였던 남북 간 재래식 군사력은 완전히 역전됐지만, 대한민국 안보는 이제 북의 핵·미사일 도박이라는 새로운 위협을 맞고 있다. 박정희라면 이 사태를 어떻게 돌파하려 했을지 궁금해진다.

 

-김창균 논설주간, 조선일보(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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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을 통해 부국강병의 발을 내딛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공화국 대한민국-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초대 소장 최형섭

1970년 1월 9일 서울 홍릉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멤버 기념사진. 모두 미국 유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최형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설득으로 한국에 돌아온 박사들이다. 1967년 KIST를 방문한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들은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1밖에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과학을 연구했고 기술을 개발했다.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이 말했다.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었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1965년 4월, 박 대통령이 방미(訪美)하기 직전에 연구소장들을 모아놓고 리셉션을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웨터를 2천만달러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나는 이렇게 역설했다. “그것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10억달러어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술개발입니다. 이제 우리도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최형섭,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조선일보사 출판국, 1996, p52)

 

없는 인재들

 

식민 시대가 끝나고 전쟁이 끝났다. 작게는 빵집에서 크게는 전력회사까지, 총독부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남긴 귀속 재산은 막대했다. 당장 신생국 대한민국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를 운영할 기술과 인력이 없었다. 전쟁 후 많은 인재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한민국에는 이들이 배워온 그 기술과 과학을 계속 연구할 공간이 없었다. 많은 유학생들은 대한민국 대신 미국을 택했다.

 

최형섭도 그랬다. 식민 시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채광야금학을 전공하고 전쟁 직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화학야금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 그런데 최형섭은 자동차용 스프링 제조업체인 국산자동차주식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했다. 국산자동차 전신은 식민 시대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국산자동차주식회사다.

 

그 무렵 ‘시발자동차 주식회사’가 군용 지프를 개조해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 최형섭은 이 시발자동차 기술 책임자를 공장장으로 스카우트했다. 훗날 박정희 정부 경제수석이 공장장 이름은 오원철이다.(최형섭, 앞 책, p21) 오원철은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이 됐다. 최형섭은 1962년 4월 4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됐다. 박정희가국보라고 불렀던 기술 관료 오원철과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일으킨 최형섭은 그렇게 공장에서 만났다. 이제부터 이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국강병의 나라 대한민국을 만든 과정 이야기다.

 

과학기술을 국가정책으로

 

1962년 1월 중앙청 옆 옛 부흥부(復興部) 청사 2층 회의실에서 경제기획원 업무보고가 있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보고를 받았다. 한 시간에 걸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고가 끝났다. 박정희가 물었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 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새로운 공장 건설이 가능한가?”

 

당시 기술관리과장인 전상근은 이렇게 회상했다. ‘경제기획원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지만 ‘기술’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술은 경제개발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차관 송정범이 답했다. “‘기술수급(技術需給)’에 대해 별도로 계획을 수립해 보고하겠다.”(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정우사, 1982, pp.9,10)

 

임기응변으로 대답한기술수급이었다. 그런데 임기응변이 이후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는 절대명제로 변했다.

 

1964년 9월 미국 요청으로 비전투병력 베트남 파병이 이뤄지고 이듬해 2월 전투병력이 파병됐다. 1965년 5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백악관에서 존슨이 박정희에게 물었다. “몇 시간이나 걸렸나?” “17시간 걸렸다.”(박정희) “앞으로 16시간 정도로 단축시킬 비행기를 보내드리겠다.”(존슨)(1965년 5월 18일 ‘경향신문’) 박정희가 타고 간 비행기는 미국대통령 전용 보잉707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장거리 운항용 비행기가 없었다.

 

남의 나라 비행기를 얻어 타고 간 박정희는 추가 파병을 약속했다. 5월 20일 백악관에서 발표한 양국 공동성명서에는 원안에 없던 조항 하나가 삽입됐다. ‘공업 기술 응용과학연구소 설치를 위한 과학 고문 파견’. ‘공과대학 설립이라는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도널드 호닉 제의에 박정희가공업기술연구소 설립 요청해 미국이 받아들인 결과였다.(최형섭, 앞 책, p53) 5·16 직후 가졌던 의문과 방미 직전 국내 연구소장들에게 스웨터만 팔 거냐고 핀잔받으며 재확인한 과학기술 우선 정책이 그렇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18일 미국을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이 백악관 앞뜰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지원’이라는 항목이 맨 끝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일보DB

 

과학기술의 집현전

 

1965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크고 작은 국공립 연구소 79개가 있었다. 그해 대한민국 예산은 848억원인데 이들 79개 연구소에 배정된 총예산은 19억원에 불과했다.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를 제외하고는 정부 행정 지원이 주된 업무였고 자율적인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해 7월 미대통령 고문 호닉 일행이 방한해 최형섭이 책임을 맡고 있던 원자력연구소와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둘러봤다. 호닉은 미국 측 파트너로 기초과학 연구소인 벨연구소를 추천했다. 최형섭은 “바로 제조업에 연결할 수 있는 응용연구가 필요하다”며 응용과학 연구기관인 배텔연구소를 추천했다.(최형섭, 앞 책, p54) 

 

대통령 박정희가 개인 자격으로 KIST 설립을 신청하고 허가받은 허가장. 박정희는 KIST는 물론 국방과학연구소(ADD),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여타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개인 돈을 출연했다. 전 과학기술 비서관 김주한은 이렇게 말한다. “굳이 개인 돈을 출연할 이유는 없었다. 이는 과학 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를 표시한 것.”/김주한 제공

 

1966년 2월 22일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발족했다. “대통령이 나서면 진척이 빨라진다”는 기술관리국장 전상근이 낸 아이디어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자연인 박정희 자격으로 100만원을 출연하고 본인이 설립자로 법인 등록을 신청했다. 다음 날 청와대에서 초대 소장 임명식이 있었다. 초대 소장은 최형섭이었다.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과 전상근에게 박정희가 말했다. “세종대왕이 학자들을 모아 집현전에서 한글을 만드셨다. 대한민국은 KIST에 과학자를 모아 기술을 개발하자.”(전상근, 앞 책, pp.81, 89)

 

1966년 서울 홍릉에 KIST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해 KIST에 배정된 예산은 2억5000만원이었다. 완공되는 1968년까지 KIST에 배정된 예산은 총 27억7000만원이었다.(과학기술처, ‘과학기술연감(1967년)’, p10)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 최형섭.

 

초대 소장 최형섭과역두뇌유출

 

이후 ‘연구할 공간이 없어서’ 미국을 택했던 두뇌들 유치 작업이 벌어졌다. 초대 소장 최형섭은 배텔연구소를 통해 지원을 받았던 후보 과학자 78명을 모두 만났다.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개인 면담에서 최형섭이 내건 조건은 이러했다. “노벨상을 희망하는 사람은 응모하지 마라. 논문 쓸 생각도 마라. 연구 외에 돈 벌 생각도 마라.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기초과학 연구는 꿈도 꾸지 말고, 당장 기업에서 써먹을 기술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 18명이 1차 유치 과학자로 선정됐다. 월급은 6만~9만원이었다.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많았다. 1967년 9월 KIST를 찾은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이건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규정했다. ‘며칠 붙어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들 추측과 달리 이들은 국내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이들을 보고 다른 재외 과학자들도 하나둘씩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KIST의 두뇌 유치는 성공이었다.’(최형섭, 앞 책, p98)

 

사농공상의 철폐와 과학 입국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후 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됐다. KIST에서 개발한 과학기술은 에어컨 냉매 대체물질과 반도체 절연체, 포항제철 기술개발과 광섬유 통신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부국과 강병의 시작이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싹틔운 최형섭은 2004년 죽었다. 지금 최형섭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 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이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은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었다.” 1991년 대한민국은 해외 두뇌 유치 사업을 중단했다. 필요가 없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내 이공계 박사 학위 취득자는 14명이었다. 2022년 한 해 대한민국 이공계 국내 박사 학위 취득자는 7578명이다.(국사편찬위, ‘한국문화사’. 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 최형섭 묘. 비석 기단에는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고 새겨져 있다. /박종인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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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별세… 한국경제 기틀 마련한 전문 관료
朴대통령 "그는 國寶야" 찬사… 중동 진출, 방위산업에도 앞장서
 

 

1965년 초, 상공부 화학공업 1국장 오원철은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북한에서는 비료, 비날론 섬유 등 모든 화학 및 섬유제품을 석탄을 원료로 해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기를 많이 쓰고 생산비가 많이 들어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폐기한 공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경공업 분야에서는 남한이 단연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설득당한 박정희 대통령은 즉석에서 '석유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해 준비 작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가발이나 섬유 같은 경공업으로 근근이 먹고 살던 대한민국 땅에 중화학공업이 태동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2년 국내 최초 울산석유화학단지가 준공하면서 본격적인 '한강의 기적'이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을 이끌며 박 대통령으로부터 '국보(國寶)'로 불렸던 오원철 전(前)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 91세로 별세했다. 그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대통령을 보좌하며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만든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이었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2005년 펴낸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책에서 고인(故人)을 "박정희, 김정렴(비서실장)과 함께 '삼두정치'를 통해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테크노크라트(전문 관료)"라고 표현했다.

오원철(왼쪽 사진 오른쪽)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1970년대 부산한독기계공고를 순시하던 박정희(왼쪽에서 둘째)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산업 역군을 키우기 위해 우수 공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오른쪽 사진은 2013년 본지와 인터뷰하는 오 전 수석. /동서문화사·채승우 기자 

 

1970년대 '오일 쇼크' 당시 중동에 진출해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묘안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고 유가가 치솟자 막 중화학공업의 걸음마를 뗀 대한민국은 치명상을 입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고 물가가 치솟았다. 공군 소령 출신의 오 수석은 1974년 1월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중동은 작업 환경이 나쁜 곳이어서 선진국 기술자는 돈을 아무리 줘도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제대 장병이 수십만 명이나 있습니다. 중동에서 또 중요한 게 공기(工期) 단축인데, 우리나라가 선진국보다 기술력은 낮아도 여기에 강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진 이후 삼환기업,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이 차례로 중동에 진출했다. 그러자 한 번도 구경도 못 한 규모의 달러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인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표리일체(表裏一體)"라고 대통령을 설득해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무기는 외국산을 써야 한다"고 저항하는 군인들에게는 "외국산 구매에만 매달리지 말고 국내 방위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러 오늘날 한국은 전투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고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에서 제대한 후 최초 국산 자동차인 시발자동차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그러다 1961년 5·16 직후 기술 인재를 찾던 박 전 대통령에 의해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과장으로 발탁되며 공직에 입문했다. 명석한 두뇌에 배짱과 추진력을 갖춘 고인을 박 대통령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총애했다. 창원 공업단지 시찰을 마치고 만족한 박 대통령이 간담회를 하며 기자들 앞에서 "오원철이는 국보야, 오 국보!"라고 칭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숙원 사업이던 행정수도건설 사업도 고인이 기획단장을 맡아 추진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신군부가 들어서자 고인은 '구악'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권력형 축재 혐의로 체포돼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12년간 대외 활동을 못 하고 자택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박 대통령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선진국 입구까지 끌어올린 자신의 경험을 후대에 남기는 일에 매진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형 경제건설'이라는 7권 분량의 대작을 썼고, 2006년에는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라는 제목의 672페이지 책을 냈다. 2009년엔 박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영문 자서전 '더 코리아 스토리'를 출간하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를 향한 비판에 그는 평생을 조국 근대화에 몸바쳤다는 자부심으로 맞섰다. 유신에 대해서는 "경제 대국 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고, 5·16에 대해서는 "한국식 산업혁명의 출발이자, 10여 년 만에 민생고를 해결해 '혁명공약'을 완수했다"고 했다.

 

-최규민/김성모 기자, 조선일보(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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