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697

[패전 후 일본인 71만명, 단돈 1000엔씩 들고 조선을 떠났다]

패전 후 일본인 71만명, 단돈 1000엔씩 들고 조선을 떠났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한강의 기적 마중물 된 일본인 귀속 재산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공공기관, 단체, 회사, 개인 등이 소유한 일체의 재산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청이 접수하고 그 소유권을 행사한다.”(미군정 법령 제33호, 제2조. 1945.12.6.) 해방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 축적 면에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2위에 해당하는 상대적으로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라, 한반도의 산업 구조는 광공업 비율이 53%, 제조업 중 중화학공업 비율이 51.3%에 달했다. 다만, 그중 80%가 일본 정부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산업화의 과실이 ..

[해방 이후 평양, 광복 직후엔 '민족주의'… ]

해방 이후 평양, 광복 직후엔 '민족주의'… 소련군 나타나며 갑자기 '공산주의' 3월 26일 북한과 일본은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축구 국가대표 경기(A매치)를 치른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A매치 경기가 열리는 것은 4년여 만입니다. 2019년 10월 한국과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를 김일성 경기장에서 치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평양은 매일 뉴스에 나오지만 가장 멀고 잘 모르는 도시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의 평양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당시 평양 지역의 정치·사회적 특징을 알아보고, 이어서 해방 이후 평양에서 일종의 임시정부 기능을 맡았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중심지였던 평양 평양..

[‘건국전쟁’ 62만명, 이제야 걷히는 이념 전쟁의 장막 뒤] ....

[‘건국전쟁’ 62만명, 이제야 걷히는 이념 전쟁의 장막 뒤] [지우다 못해 조작까지 해서 없애버리는 이승만의 흔적] ‘건국전쟁’ 62만명, 이제야 걷히는 이념 전쟁의 장막 뒤 [강경희 칼럼]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런(run)승만’이라고? 전시 외교 올인하고 망명정부 거부하면서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머리맡에 권총 놔둔 ‘건(gun)승만’이었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개봉 17일 만에 관객 60만명도 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황당하게 와닿았던 장면은 한강다리 끊고 도망간 ‘런(run)승만’으로 조롱받고 폄하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김덕영 감독이 3여 년간 제작하면서 101분 필름에 다 보여주지 못한 미반영 분량이 훨씬 많을 것이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6..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선포와 원구단(圜丘壇)] ....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의 제단, 원구단(圜丘壇)] [덕수궁 돌담길]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영빈관… 건립 2년 뒤 외교권 빼앗겨 무용지물로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한 소장품 도록 '조명기구'에서 대한제국 궁궐의 대형 샹들리에를 소개했어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조명 회사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만든 제품이에요. 특징은 장식에 대한제국 황제 문장(국가나 집안 등을 나타내고자 쓰는 상징적 표지)인 이화문(자두꽃 문양)을 썼다는 점입니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의 접견실 회랑에 1904년 무렵 설치된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돈덕전은 어떤 건물이기에 이런 근대 서양식 조명 기구가 달렸던 걸까요? 대한제국의 외교를 위한 영빈관 겸 연회장 '사진 찍기 좋..

[“난 이승만을 너무 몰랐다”...‘건국전쟁’ 상영관 눈물과 박수]

[“난 이승만을 너무 몰랐다”...‘건국전쟁’ 상영관마다 눈물과 박수]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내는 역사가들] “난 이승만을 너무 몰랐다”...‘건국전쟁’ 상영관마다 눈물과 박수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한 다큐 영화 ‘건국전쟁’ 상영관은 전국 301곳에 이른다. 처음 132곳에서 시작해 두 배를 넘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그가 만든 나라에서 살아온 국민의 상봉이 그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100분 동안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다. 필자도 영화를 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뛰고 눈이 뜨거워졌다. ▶각종 감상평 사이트엔 “이승만을 몰랐던 내가 부끄럽다”는 글이 줄을 잇는다. 베스트셀러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는 “이제..

[고구려 두번째 수도.. 국내성 유적지]

고구려 국내성 유적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광개토대왕비·장군총 있어 지난달 24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디지털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처음으로 공개했어요. 이 비석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0년)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1~ 413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져 있죠. 문헌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안 일대는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비 외에도 고구려 시대의 성곽과 고분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분포해 있어요. 지안으로 함께 가서 고구려 역사를 살펴보겠습..

[故 최창조 교수, 術을 學으로 높인 풍수학인… ] [한국의 풍수]

[故 최창조 교수, 術을 學으로 높인 풍수학인… “그곳에도 단골술집 있겠죠”] [한국의 풍수] 故 최창조 교수, 術을 學으로 높인 풍수학인… “그곳에도 단골술집 있겠죠” 31일 별세 최창조 교수를 기리며 김두규 우석대 교수 추모 기고 2013년 12월 17일 최창조가 30년 전‘한국의 풍수사상’을 펴낼 때만 해도 광화문 뒤에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헐려 북악산이 훤히 보인다. 그는“일제는 조선사람들의 무덤을 건드리는 대신 왕궁인 경복궁의 목과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건물을 세워 단번에 조선의 기를 누르려했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풍수쟁이는 많았어도 진정한 풍수 학인은 없었다. 최창조 교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1980년대 상황이다. “지리학”이란 명칭으로 ‘국학(..

[美蘇는 한반도의 38선으로 일본 제국을 분할했다]

美蘇는 한반도의 38선으로 일본 제국을 분할했다 [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반도 해방 1945년 9월 말 돈 오브라이언(Don O' Brien, 왼쪽)이 38선 인근에서 소련군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군 소속 사진가 돈 오브라이언은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에 도착해서 다음해 1월 떠날 때까지 해방 직후의 한국 모습을 기록했다./돈 오브라이언 flickr 계정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전개된 미·일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개전 때와 달리 일본군은 승전에 대한 확신 없이 개전했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하와이 공습을 성공시킨 후 의심했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일본은 중화민국을 지원..